"매년 수만개가 넘는 국가 R&D과제 전부를 성과 평가하는 나라는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 중 대한민국뿐이다."

"당해연도 연구성과에 대한 평가를 다음해 2~3월까지 끝내라고 하는 나라도 역시 대한민국뿐이다."

지난달 30일 과학기술혁신본부 주최로 열린 '국가연구개발사업 평가제도 개선 워크숍'에 참석한 일선 연구자들이 방청석에서 쏟아낸 불만이다.

연구자들은 "평가보고서 쓰느라 연구할 시간이 없다"거나 "연구비 조금 주면서 받은 돈을 어떻게 쓰는지 보고하는 절차는 갈수록 늘어난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그러나 정부 내에선 예산 책정 등의 문제로 오히려 성과평가 시기를 (다음해 2~3월보다) 좀 더 앞당겨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는 등 일선 연구원과의 시각차가 큰 상황이다.

사실 한국만큼 정부 R&D 과제에 대한 성과평가를 자주 하는 나라는 드물다.

미국이나 유럽 등 선진국들은 대개 연간 단위로는 모니터링만 하고 성과 평가는 3~5년마다 한 번씩 한다.

연구개발의 특성상 해마다 성과평가를 하는 것이 힘든 데다 과도한 평가에 따른 시간 및 인력 낭비를 막기 위해서다.

그러나 한국은 2005년 '연구성과평가법'을 제정하면서 연례 평가를 오히려 강화했다.

한 국책연구소 관계자는 이와 관련,"선진국들은 선정한 연구자에게 믿고 맡기는 편인 데 반해 우리 사회는 신뢰기반이 부족하다보니 자꾸 엄격한 평가를 강조한다"며 "그러나 겉치레 평가가 많다고 R&D 효율성이 높아지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연구성과를 빨리 보여줘야 한다는 정부 조급증도 잦은 평가를 부르는 이유로 꼽힌다.

우창화 한국산업기술평가원 기술평가본부장은 "R&D 특성상 과제가 끝났다고 바로 성과가 나오는 게 아닌데 성급한 면이 있다"며 "큰 틀에서 볼 때 선진국처럼 3년이나 5년 주기로 성과를 평가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강조했다.

가령 올해 12월에 끝난 과제의 경우 논문이나 특허가 나오는 데만 몇개월이 걸리는데 당장 내년 2~3월까지 성과평가를 하라면 평가서에 아무것도 쓸 게 없다는 것이다.

또 R&D사업이 잘못됐을 때 책임을 면할 수 있는 핑곗거리가 필요한 공무원들이 이런저런 부작용을 고려 않고 평가 강화만을 강조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려면 결국 성과평가 시스템의 패러다임을 '감시와 관리'에서 '신뢰와 책임'으로 전환하는 게 시급하다고 입을 모았다.

제대로 된 연구자를 선정해서 믿고 맡기면서 연구 성과가 나오기를 기다려주는 대신 부실한 연구나 조작된 연구에 대해서는 확실한 페널티(벌칙)를 주자는 것이다.

고계원 아주대 수학과 교수는 "선진국에선 연구자를 믿고 맡기는 대신 결과에 대해 거짓말을 하면 연구현장에서 영구퇴출시켜 버리기 때문에 적당히 연구해서 대충 보고하는 것을 상상할 수도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연구 결과를 조작하는 등의 잘못을 저질러도 대개 1~2년 정도 연구참여 제한 조치를 받는 게 고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