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肯植(정긍식) < 서울대 교수·법학 >

지방에서 시작된 비리는 중앙을 강타했고,급기야 우리를 대표하는 기업에까지 미쳤다.

이런 우리의 사정을 해외 유수 언론은 '떡값'이라고 비꼬았다.

특히 우리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의 비리를,시민이 관리들의 비리를 고발하는 것을 탐탁지 않게 본다.

그 탓인지 우리는 유일하게 직계존속과 그 배우자에 대한 고발을 금지하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별 탈 없이 그럭저럭 살아왔다.

하지만 국경을 넘어선 지구촌의 시대에는 더 이상 우리만의 삶의 방식이 통하지 않는다.

결국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떡값의 문화'를 청산해야 한다.

문제는 이러한 비리는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 내부의 사정이라는 것이다.

이를 바로잡는 방법은 안에 있는 사람의 자발적 신고가 필수다.

그런데 내부의 목소리는 또 다른 폐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즉 조직의 기강이 문란해지고 나아가 사회도 그렇게 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조선의 기본법전인 경국대전에는 '부민고소금지법(部民告訴禁止法)'이 있다.

즉 백성이나 하급관리가 직속 수령이나 관찰사를 비리 등을 이유로 고발하는 것을 원칙적으로 금지하고,고발한 사람을 엄하게 처벌했다.

군사부일체의 유교이념에서 볼 때 하급자가 상급자를 고발하는 것은 국왕에 대한 반역으로 인식됐다.

세종대에 허조(許稠)는 상하의 명분을 분명히 하고 이를 통해 국가의 기본질서를 굳건히 하기 위해 건의했다.

그 정당성은 '풍속론'으로 부민이 수령 등을 고발하는 것은 명분을 어겨 국가의 풍속과 기강을 해친다는 것이었다.

조선 초기 재산을 둘러싼 소송이 엄청나게 많았다.

대개는 법과 원칙에 따라 공정하게 처리됐다.

하지만 때로는 사사로운 정이나 이익에 따라 부당하게 처리되기도 했다.

또 세금과 부역을 둘러싸고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태종은 백성들로부터 소리를 듣기 위해 신문고제도를 설치했다.

신문고제도는 태종의 의도와는 다르게 운영됐고,폐단까지 낳았다.

다른 사람을 무고하거나 특히 백성이 수령을,하급관리가 상관을 고발하기에 이르렀다.

이래서는 기강이 서지 않고,나라를 운영할 수 없는 지경이 됐다.

이에 대한 반성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부민고소금지법이다.

모든 일에는 일장일단이 있는 것이 사물의 이치다.

부민고소금지법 때문에 비리를 저지른 수령을 처벌할 수가 없었다.

백성들이 그들의 억울함을 직접 하소연하는 길은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관찰사가 지방수령의 비리를 규찰하고,또 사헌부나 사간원에서 하급관리는 물론 상급관리의 감독책임을 묻고,심지어 암행어사까지 파견했지만 큰 실효는 없었다.

비리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입을 틀어막았기 때문이다.

세종의 고뇌는 깊어져 갔다.

처음 기도한 대로 기강은 섰지만 관리들의 부정부패는 도를 넘어섰고,이는 다시 풍기의 문란을 불러왔다.

세종은 지혜를 냈다.

'자기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고소를 허용하면서 의도적이지 않고 실수로 잘못을 한 수령에 대해서는 형사처벌을 면제하는 타협책을 제시했다.

이후 자기의 억울함의 범위는 점차 넓어졌고,조선후기에는 국왕이 거동할 때 직접 하소연하는 상언(上言),격쟁(擊錚)으로까지 발전했다.

이를 계기로 지방관의 비리는 어느 정도 근절됐고,지방은 안정됐으며,조선은 공론(公論)이 중심을 이루는 사회로 될 수 있었다.

중국의 거대한 인공건축물인 만리장성은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끊임없이 왕조가 교체됐고 때로는 오랑캐가 중원을 지배했다.

하지만 장성을 넘어와 왕조를 세운 외적은 없다.

그것은 내부에서 성문을 열어준 자가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

'정의(正義)'의 반대는 불의가 아니라 '의리(義理)'이다.

부패와 비리는 바로 내부의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