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는 '은행은 망하지 않는다'는 고정관념을 무너뜨리기에 충분했다.

1998년 4월 정부가 마련한 긴급 처방책 '금융ㆍ기업 구조개혁 촉진 방안'에 따라 대동 동남 동화 경기 충청 등 5개 은행이 두 달 만에 퇴출됐다.

이를 시발점으로 인수ㆍ합병(M&A)의 거센 회오리가 은행권을 강타했다.

1999년엔 상업은행과 한일은행이 합쳐 한빛은행(현 우리은행)으로 다시 태어났으며,장기신용은행과 보람은행은 각각 국민은행과 하나은행에 흡수됐다.

'조-상-제-한-서'의 은행 서열에서 가장 앞자리를 차지했던 조흥은행은 나중에 신한은행과 합쳐졌으며,제일은행은 영국 스탠다드차타드은행에 넘어갔다.

서울은행 역시 하나은행에 합병됨으로써 과거 '빅5'는 국민 신한 우리 하나의 '빅4'로 재편됐다.

1997년 30개에 이르던 은행 숫자도 지금은 7개(시중은행 기준)로 줄어들었다.

이 같은 구조조정에 힘입어 은행산업이 급성장한 것은 사실이다.

우선 국내 은행의 자산은 1996년 말 421조원에서 지난해 말엔 1262조원으로 세 배로 불어났다.

순이익도 같은 기간 4조원 적자에서 13조5000억원 흑자로 돌아섰다.

건전성 지표인 BIS비율(국제결제은행 자기자본비율)도 7%에서 12.8%까지 높아졌으며 고정이하여신비율은 2.7%에서 0.8%로 낮아졌다.

10년 전엔 세계 100대 은행에 국내 은행이 단 한 곳도 포함되지 않았지만 지금은 국민 신한 우리 등 세 개 은행의 이름이 올라 있다.

하지만 은행산업의 성장에도 불구하고 국내 은행들의 경쟁력이 과거에 비해 획기적으로 높아졌다고 보는 전문가들은 많지 않다.

오히려 양적 확대에 비해 질적 발전은 턱없이 부족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무엇보다 은행들의 쏠림현상(herd behavior)이 여전하다.

2001년과 2002년엔 신용카드를 무분별하게 남발함으로써 2003년 신용카드 대란을 불러 온 장본인으로 은행이 카드사와 더불어 꼽히고 있다.

2004년과 2005년 집값이 뛰자 너도나도 주택담보대출을 늘리느라 혈안이었고 금융감독 당국이 주택담보대출을 제한하자 지난해 하반기부터는 앞다퉈 중소기업 대출 세일에 몰려들었다.

'땅짚고 헤엄치기'식 영업 관행도 그대로다.

앉아서 예금을 받아 부동산 등 자산을 담보로 잡고 대출해 줌으로써 마진을 챙기는 것이 국내 은행들의 기본 수익구조다.

전체 수익에서 비이자수익이 차지하는 비중은 13%에 불과하다.

리딩뱅크라는 국민은행마저도 올 들어 9월까지 비이자부문 이익이 1조3140억원으로 이자부문 이익 5조1372억원의 4분의 1에 불과하다.

비이자부문이익 가운데 LG카드 지분 매각 이익이 4320억원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실제로는 17%에 그친다.

영국(46%) 미국(45%) 독일(27%) 등 선진국 은행과는 비교가 되질 않는다.

국내 은행들의 비이자부문 이익 가운데 상당 부분은 점포를 찾아온 손님에게 펀드나 방카슈랑스 상품을 팔아 챙긴 수수료다.

M&A 주선 등 투자은행(IB) 업무를 통해 올린 이익은 미미한 수준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여유 있는 대기업들은 은행을 외면하고 있으며,주식시장 등 직접금융시장을 이용하기 힘든 중소기업만 은행의 기업고객으로 남게 됐다.

은행들이 '우물 안 개구리' 신세를 면치 못하는 것도 과거와 다르지 않다.

해외 자산의 비중이나 해외 부문의 이익 비중은 전체의 3% 안팎이다.

해외 자산이 90%에 이른다는 스위스계 UBS나 해외 수익 비중이 48%라는 영국계 HSBC와는 대조적이다.

어렵다고 모두 다 해외 지점을 폐쇄한 결과이며,위험을 무릅쓰고 우리보다 발전 정도가 낮은 중국 동남아 중앙아시아 등지에 뛰어들지 못한 탓이다.

불행 중 다행은 최근의 금융 상황이 은행에 불리하게 돌아가면서 은행들이 적극적인 대응책 모색에 나섰다는 점이다.

강정원 국민은행장은 "금융소비자들이 예금 위주에서 투자상품 위주로 금융자산을 운용하는 것은 시대적 추세이며 여기에 맞춰 은행 전략을 짤 것"이라고 말했다.

신한 우리 하나 등은 이미 지주회사 체제로 돌아서 증권 등 비은행 부문을 강화했으며,국민은행 역시 최근 한누리투자증권을 인수해 증권업에 본격 뛰어들었다.

이를 통해 투자은행으로 서서히 발돋움하겠다는 전략이다.

또 뒤늦은 감은 있지만 신흥시장 위주로 해외 진출을 본격화하고 있다.

박준동 기자 jdpow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