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 깊은 우물의 바닥까지 다 비워낸

물기 없는 내가 스산해서

지는 해의 붉디붉은 신열 저만큼에 두고

한참을 서 있는 11월

오래 앓던 정신의 밀도도 내려놓고

생의 속도마저 지워가며 낮아지는

겸허히 서늘한 계절

순한 손이 깊숙이 고요를 들이고

깊숙한 고요로 잠기고

-김은숙 '11월' 전문



11월에는 세월의 매듭이 없다.

한 해 끝자락에 자리잡고 있지만 끝은 아니다.

가을이나 겨울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다.

고요하고 흐릿하다.

스스로를 위해서는 어떤 주장도 하지 않는다.

시간의 흐름에 슬쩍 발을 걸쳐 놓고 스쳐 지나갈 뿐이다.

인생에 비춰보면 별난 것 없는 중년을 닮았다.

크게 이룬 것도,잃은 것도 없는 스산한 중년의 모습.무엇을 시작하기에도,무엇을 마무리하기에도 적당하지 않은 시기다.

대신 안으로 잠겨들기에 좋다.

팽팽한 긴장 풀어놓고 무연히 바닥으로 가라앉아 보라.상처입고 신음하는 스스로를 고요히 응시하라.무엇을 건져내지 못해도 상관 없다.

숨가쁜 생에서 가끔은 그런 순간이 필요하니까.

이정환 문화부장 j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