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도 눈물도 없는 냉정한 모습을 생각했었다.

세계적인 협상가(negotiator)라면 한 치 양보 없는 치밀함이 넘칠 것만 같아서였다.

그러나 사람좋은 웃음으로 나타난 그는 이런 선입견을 깨버렸다.

'세련'과는 거리가 먼 너무나 평범한 외모,영락없는 시골 아저씨의 모습이었다.

오히려 "저런 편한 얼굴이라야 상대방이 믿음을 갖겠구나"하는 생각이 새삼스럽게 들 정도였다.

세계 최고의 협상전략가로 불리는 허브 코헨 박사(70)와의 대담은 그래서 선수를 빼앗긴 채 시작됐다.

"뭐든지 물어보라"는 이에겐 경계를 풀 수밖에 없는 게 기자다.

능률협회 초청으로 첫 방한 세미나를 가진 코헨 박사는 숙소인 롯데호텔에서 1시간30분 동안 진행된 한국경제신문과의 단독 대담에서 일가를 이룬 고수답게 막히는 게 없었다.

50년의 내공은 기술이나 기법을 이미 초탈해 있었다.

-협상에 대해 배운 적이 없다는 게 사실인가.

"협상이라는 게 뭔지도 모른 채 협상가가 됐다.

20대 초반 로스쿨을 다닐 때 결혼을 하게 돼 할 수 없이 취직을 했는데 첫 직장이 보험회사였다.

사고가 생기면 당사자들을 찾아 다니며 합의를 이끌어내는 일을 맡았는데 성과가 좋았다.

남들이 한 달에 3건도 못할 때 15건씩 성사시켰다.

협상 방법을 전사적으로 교육하라고 회사가 사내강사를 맡길 정도였다."

-협상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모양이다.

"그런 게 있겠나.

다만 환경이 협상기술을 키우는 데 쓸모 있었던 것 같다.

인종의 용광로인 뉴욕에서 가난한 사람부터 부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부대끼며 자연스럽게 협상 스킬을 배울 수 있었다.

이후 IBM 시어스백화점 제록스 등을 거치면서 경험을 쌓았고 체이스맨해튼은행이 중국에 진출할 때 국제협상에도 관여할 수 있었다.

그렇게 이름을 좀 날렸더니 미시간대학 경영대학원 등 학교에서도 나를 불렀다."

-관여한 협상만 수천 건인데,가장 인상에 남는 협상은 무엇인지.

"미국이 구소련과 진행했던 START(전략무기 감축 협상) 협상이 생각난다.

양국이 핵무기를 점진적으로 줄여 나간다는 내용이 골자였는데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중에 레이건과 고르바초프가 직접 협상을 하면서 마무리됐다.

규모나 영향력 면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협상이었다."

-세계 최고의 협상가라는 명성을 얻었는데 혹시 협상에 실패해 본 적은 없는지.

"세계 최고라고 불리는 것은 대중적으로 이름이 알려졌다는 것일 뿐이다.

다만 나는 세상 모든 것을 협상의 관점에서 보려고 노력하는 사람일 뿐이다.

그렇게 보면 모든 협상이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라 계속 진행되는 과정(process)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과정으로 생각한다면 성공도 실패도 없는 것이다.

모든 협상은 종결돼도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패나 패배라는 것은 생각지 않는 편인데,굳이 내가 진 협상을 들라면 가족과의 협상이라고 해야겠다."

가족들에겐 져주는 것 아닌가.

"그런 면이 있지만 실제로 아이들은 정말 협상을 잘하는 편이다.

기업 리더들도 아이들의 협상 노하우를 배워야 한다.

아이들은 작고 힘이 없지만 기어코 그들이 원하는 것을 얻어내곤 한다.

아이들의 협상 노하우를 살펴보면,먼저 부모들이 비현실적이라고 느낄 정도로 상당히 무리한 요구를 한다.

또 의사결정 과정을 잘 이해하고 있다.

처음엔 엄마에게 요구하고 거절당하면 퇴근하는 아빠에게 떼를 쓴다.

아빠도 거절하면 그 다음은 할머니,할아버지를 찾아간다.

고위층(higher rank)을 공략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안돼(no)"라는 말의 의미를 잘 이해하고 있다.

그들은 부모의 거절을 "영원히 안돼"가 아닌 "지금은 안돼"로 파악하고 묻고 또 묻는다.

실제 협상에서 '노(no)'는 새로운 협상의 시작인 경우가 많다.

영향력 있는 사람에게 높은 걸 요구하고,낮은 자세로 묻고 또 묻는 것,이것이 바로 협상의 요체다."

-아이들보다 못한 어른 협상가들이 많다는 얘긴데.

"그렇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협상할 때 거만을 떤다.

말을 너무 많이 하는 경향도 보인다.

"그건 내가 잘 알아요"하면서 똑똑한 척 한다.

사실 정말 똑똑하다면 상대방이 감추고 있는 것은 들추어낼 게 아니라 모른 척할 수 있어야 한다.

상대방이 스스로 털어놓게 해야 하는 것이다.

협상이 지지부진할 때 상대방을 탓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실은 스스로 반성해야 할 것이 더 많다.

혹 내가 너무 말을 많이 한 것 아닌가,잘 듣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닌가,그래서 상대방이 화가 난 것은 아닌가 생각해야 한다.

협상 상대방에게서 배우려는 자세가 훌륭한 협상가를 만든다."

-한국인의 협상 스타일은 어떤가.

"수년 전 미국에서 기아자동차 협상단에 조언해준 적이 있었다.

한국의 협상 스타일은 일본,중국과 비슷하지만 다른 점이 참 많다.

한국인은 동양의 아일랜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미국에서 아일랜드 사람들은 빨리 화내고,빨리 용서하고,빨리 화해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한국인들은 매우 인간적인데 감정 표현에 인색한 일본과 크게 다른 점이다.

엄밀히 말하면 북부 중국인들과 비슷하고 일본과는 다른 점이 많다."

-그래도 북한보다는 못하다는 평가를 듣는다.

"북한의 방식에 문제가 있다.

북한의 협상 스타일을 소비에트 방식이라고 부른다.

구소련과 러시아의 방식이고 베트남도 같은 범주에 든다.

소비에트 방식을 요약하면,우선 처음부터 지나치게 큰 요구를 한다.

대신 양보는 거의 하지 않는다.

그리고 약속을 잘 지키지도 않는다.

김정일 위원장이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협상에서 약속했던 것을 얼마나 지켰는지 보라."

-소비에트 방식은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상대의 무리한 요구에 반응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초기에 많은 양보를 하면 절대 안 된다.

상대가 자신들의 방식대로 협상이 진행되지 않고 있음을 깨닫게 해야 한다.

그리고 제3자,예를 들면 중국을 활용해야 한다."

-최근 아프가니스탄 한국인 피랍 사건에서 한국 정부의 협상력에 문제를 제기한 사람이 많다.

"협상 전문가로서 보기엔 아주 성공적인 협상이었다.

전담팀을 급파한 것,시간을 갖고 협상에 임한 것,그리고 군사적 수단을 자제한 것 등이 잘한 점이다.

대부분의 인질을 무사히 구해낸 것 자체가 큰 성공이다.

"(코헨 박사는 이 대목에서 1979년 이란 미국대사관 인질 피랍 사건이 미국 정부의 잘못된 대처로 무려 444일간이나 끈 것을 예로 들었다.

당시 카터 미국 대통령은 호메이니 측과의 협상 대신 인질들이 무사히 돌아올 수 있도록 집집마다 노란 리본을 달고,촛불을 켜고 기도하자는 식의 감성적 접근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결국 미국의 초조함을 읽어낸 이란이 주도권을 잡게 돼 인질 사건의 장기화를 초래했다고 지적했다.)

-기업 경영도 협상의 연속으로 봐야 할 것 같다.

경영자들에게 주는 당신의 메시지는 무엇인가.

"협상을 게임으로 여유있게 보는 시각이 필요하다.

목표에 너무 집착해서는 안 된다.

대신 절대 포기하지 말고 끈질기게 협상에 임해야 한다.

인간적인 것이 정말 중요하다.

이메일 팩스 편지로 사람을 대하지 마라.직접 가서 만나야 한다.

부탁할 것이 있으면 손을 잡고 '도와 달라'고 얘기하라.직접 가서 인간적으로 만나는 것,그리고 그렇게 만든 관계를 바탕으로 신뢰를 쌓아가는 것,이것이 가장 강한 협상력이다.

"정리=신희철 한경 가치혁신연구소 연구원 ksk300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