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디 웨일 전 씨티그룹 회장(74)은 '금융 황제'로 불린다.

씨티그룹 회장 재임 시절 그만큼 막강한 권한을 행사한 이도 드물다.

비록 타의에 의해 물러났지만 씨티그룹에 대한 그의 영향력은 지금도 상당하다.

웨일 전 회장의 이력은 월가 최고경영진의 생리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 자신이 금융회사 사환에서 출발해 세계 최대 은행의 수장이 됐다.

이 과정에서 쓰라림도 있었고 환호도 있었다.

어렵게 쟁취한 금융 황제 자리였지만 내려오는 과정은 허무하기 짝이 없었다.

웨일 전 회장의 이력만큼 오로지 승자만이 생존하는 월가 약육강식의 법칙을 잘 보여주는 사례도 드물다.

웨일은 1933년 뉴욕 브루클린에서 폴란드 유대인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처음 월가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55년 22세 때.베어스턴스의 사환으로 취직하면서부터다.

그는 5년 뒤 친구 3명과 함께 20만달러를 투자해 '카터,벌린드,포토마 앤드 웨일'이란 작은 증권사를 세우면서 금융 황제의 자질을 드러낸다.

1970년대는 부실 금융사들이 무더기로 쏟아질 때.웨일은 부실 증권사를 잇따라 인수해 마침내 1979년 '시어슨 로브로즈'란 증권사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시어슨은 무섭게 성장해 메릴린치에 이어 미국 2위의 증권사로 발돋움했다.

웨일은 그 후 메릴린치를 따라잡기 위해 1981년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와 합병을 결정한다.

이때 그가 받은 직책은 CEO가 아닌 사장 자리.CEO와 사장은 불과 한 단계 차이지만 권한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그는 증권업무에서 손을 떼도록 강요받은 데다 생각했던 것보다 비전이 없다고 판단,1985년 회사를 사퇴하면서 그동안 쌓았던 공든 탑을 무너뜨리고 만다.

그러나 이때의 실패는 금융 황제가 되기 위한 보약에 불과했다.

1986년 '커머셜 크레디트'라는 소비자금융회사를 사들인 뒤 이를 모태로 스미스바니 증권의 지주사인 프리메리카를 인수했다.

1993년에는 아메리칸 익스프레스로부터 자신의 회사였던 시어슨을 되사들였고 보험업계의 명문사인 트레블러스도 손에 넣었다.

급기야 1997년엔 채권시장의 강자인 살로먼브러더스까지 매입해 금융 황제로서의 위용을 갖추게 된다.

화룡점정은 다음 해인 1998년 찍어졌다.

1998년 씨티은행의 모회사인 씨티코프와 합병한 뒤 씨티그룹의 공동회장 겸 CEO에 오른다.

그렇지만 하늘 아래 황제가 둘일 수는 없는 법.또 다른 공동회장 겸 CEO인 존 리드와 사사건건 충돌해 '두 회장 중 한 명은 물러나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됐다.

합병 2년 후인 2000년 2월.씨티그룹은 단일 회장 추대를 위한 긴급 이사회를 열고 웨일과 리드 두 회장을 차례로 면담한다.

먼저 이사들을 만난 리드는 웨일과의 공동 퇴진 및 회장 외부 영입 의견을 제시한다.

그러나 웬걸,웨일은 "단일 회장은 자신밖에 없다"는 주장을 펼쳤다.

결국 웨일이 단독 회장으로 추대돼 진정한 금융황제에 등극하는 데 성공한다.

베어스턴스의 사환으로 월가에 발을 들여놓은 지 꼭 45년 만이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금융 황제의 앞길은 탄탄대로처럼 보였다.

자신의 분신이었던 제이미 다이먼 전 살로먼스미스바니 CEO(현 JP모건체이스 CEO)도 내쳤던 웨일이었기에 그의 집권은 오래갈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아니올시다'였다.

자신이 부렸던 술수가 부메랑이 돼 돌아와 웨일은 몇 년 만에 회장 자리를 내놓게 된다.

그가 리드와 황제 자리를 다투던 때,웨일은 이사회 멤버였던 AT&T의 마이클 암스트롱 회장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사내의 유명한 애널리스트를 시켜 AT&T 투자등급을 상향조정토록 만들었다.

결국 이것이 문제가 됐다.

증권거래위원회(SEC) 조사에서 관련 이메일이 들통났고 금융 황제도 퇴진의 길을 걸어야 했다.

웨일은 결국 2003년 10월 찰스 프린스 당시 글로벌투자부문 대표에게 CEO 자리를 넘겨줬다.

2006년엔 회장 자리까지 내놓아야 했다.

황제가 되기 위한 과정은 길고 험난했지만 황제로서의 재임 기간은 짧았던 셈이다.

뉴욕=하영춘 특파원 ha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