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 啓 炯(이계형) < 표준협회장 lgh@ksa.or.kr >

세상에는 별의별 현수막이 다 있다.

"○○동 납골당 설치 결사 반대,한 달에 20kg 다이어트 보장,둘만의 짜릿한 성인교제…." 이런 현수막들을 볼 때면 무분별한 노출과 상술에만 이용하는 듯해 씁쓸한 기분이 든다.

지인으로부터 들은 얘기인데,우리나라가 다민족 국가로 들어서면서 그 부모 사이에서 자란 아이가 "○○처녀와 결혼하세요"란 현수막을 보곤 "엄마 저건 뭐예요"라고 물어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고 한다.국제결혼이 보편화하면서 아무 생각없이 내건 현수막이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히는 것이다.현수막 하나가 개인의 인권뿐 아니라 국가적 이미지마저 손상시키고 있다.

사회적 이슈와 이해집단의 갈등이 커지면 현수막도 늘어난다.특히 자기가 사는 지역에 화장장이나 납골당 같은 혐오시설 유치 계획이 발표되면 어김없이 현수막이 걸린다.집단 이기주의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것이다.배관 교체,동파이프 시공 같은 개인 간 정보교류에 그칠 내용이 공공 정보로 포장되어 걸린다.이 외에도 성적 수치심을 자극하고,땅투기를 부추기는 등 거리의 미관을 해치는 현수막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반면에 희망과 위안을 주는 현수막도 있다.2002년 월드컵 당시 우리는 16강을 기원하면서 "꿈은 이루어진다"는 국민적 열망을 담은 현수막을 탄생시켰다.덕분에 4강까지 진출했다.대입 시험날에는 어김없이 고사장 안팎에 선배를 응원하는 후배의 격려 현수막이 걸린다."당신은 찍으셔도 정답입니다." 웃음을 자아내는 문구는 보는 이의 마음마저 훈훈하게 한다."자기야,합격했다고 나 버리면 안돼" 같은 애교 섞인 현수막이 대학가의 화제가 된 적도 있다.명절 때면 "고향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란 현수막에 넉넉한 인심과 정을 느낀다.

필자는 시간이 나면 양재천을 산책하곤 한다.주민과 자치구의 애정으로 되살아난 양재천을 걷다 보면 "양재천을 가꿉시다"란 현수막이 눈에 띈다.이런 계몽형 현수막보다는 양재천을 주제로 한 시나 그림,영화 등 지적 창작물을 알리는 문화형 현수막이 많았으면 한다.

다행히 몇 해 전부터 양재천을 여유와 낭만으로 물들이는 영화 관람이나 단축 마라톤 등 문화행사 현수막이 늘고 있다.

어떤 현수막이 좋고 나쁜지는 개인마다 다를 것이다.보는 시각이나 내용에 따라 정보의 가치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다만 남을 배려하는 따뜻한 현수막이 많았으면 좋겠다.보기에도 좋고,내용까지 깔끔한 현수막은 오래 기억에 남는다.알찬 내용으로 가슴에 다가오는 현수막은 거리를 한층 인간미 넘치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