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그때 월街(가)에 먹을것을 줬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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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濟民(이제민) < 연세대 교수·경제학 >
데이비드 립턴이라는 사람을 기억하는가.
아마도 기억하는 이들이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인에게 그는 매우 중요한 사람이다.
립턴은 10년 전 한국의 외환위기 때 미국 재무부의 외무차관보였다.
10년 전인 1997년 11월21일 한국은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했다.
그러나 구제금융 신청보다 오히려 더 중요한 사건은 일주일 뒤인 28일 립턴의 내한(來韓)이 아닌가 싶다.
립턴이 온 뒤로는 사실상 IMF의 구제금융 업무는 그의 지휘를 받게 됐다.
립턴은 어떻게 해서 한국에 오게 됐는가.
그것을 아는 것이 외환위기 성격을 이해하는 첫걸음이다.
한국 외환위기의 직접적 원인은 무엇보다 '엔 캐리 트레이드 청산'이다.
1990년대 중반에도 일본의 금리가 엄청 싸서 한국의 은행들이 일본 은행들로부터 대거 자금을 빌렸다.
그 자금이 단기 자금이었던 것은 물론 한국 측의 잘못이었다.
그러다가 1997년 일본 국내에서의 금융 불안 등으로 일본 은행들이 자금을 회수하면서 위기가 시작됐다.
일본 은행들이 자금을 회수하기 시작할 때 한국 정부는 무얼 했는가.
팔짱만 끼고 있지는 않았다.
일본 정부에 일본 은행들이 한국에서 대출금을 회수하지 않도록 '행정 지도'를 하거나 외화를 빌려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일본의 답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내세운 이유는 일본 자체도 사정이 어렵다는 것이었지만,실제로는 미국이 압력을 넣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입장은 한국이 위기를 해결하려면 일본과 둘이서 할 것이 아니라 국제기구인 IMF에 가는 게 정도(正道)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주장은 IMF는 '최종 대부자(lender of last resort)'라는 사실과 맞지 않는다.
위기를 맞은 나라가 최대한 스스로 해결하고 안 될 때 가는 곳이 IMF 아닌가.
이것은 구제금융이라는 불확실한 일에 드는 자금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IMF의 최대 주주인 미국의 납세자 입장에서 보아도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미국 정부는 한국 스스로의 노력을 방해하고 IMF로 가도록 한 것이다.
미국이 그렇게 한 이유는 무엇인가.
한국의 위기를 이용해 그 전에 지속적으로 요구해도 한국이 들어주지 않았던 자본시장 개방 등의 요구를 관철시키려 한 것이다.
미국은 자신의 영향력 아래 있는 IMF가 그런 일을 잘하리라고 기대했지만,막상 IMF가 일하는 것을 보니 그렇지 못했다.
IMF 구제금융팀의 일부는 자본시장 전면 개방,고금리,전면적 구조조정 등 미국의 요구가 위기를 해결하는 방책이 못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사정 아래서 IMF 구제금융팀을 지휘ㆍ감독하기 위해 내한한 사람이 바로 립턴이었다.
1997년 가을에 발생했던 것은 외환위기 발발을 막고 일단 일어난 위기가 가져오는 손실을 최소화하려는 한국 측 노력이, 그 기회에 자신의 요구를 관철시키려는 미국의 의도에 종속되는 과정이었다.
립턴의 내한은 바로 그런 과정의 최종단계였다.
그러나 립턴의 지휘를 받은 IMF의 조치는 나가는 외자를 되돌리지 못했다.
결국 미국 정부가 나서서 채권 은행들에 '행정 지도'를 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었다.
일본 정부에는 못하게 했지만 스스로는 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미국의 요구가 100% 관철된 것은 물론이다.
올해 외환위기 10년을 맞아 많은 논의가 있었다.
그러나 그 결과와 관계없이 위기가 일어나는 과정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그 성격을 이해하는 관건(關鍵)이다.
이것은 반드시 미국이 잘못했으니 우리는 반성할 게 없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한국의 반성은 지극히 실용적인 것이어야 한다.
"위기 전 월스트리트 투자자에게 먹을 것을 좀 던져 주었어야 했는데,너무 움켜쥐고 있었다"는 당시 고위정책 당국자의 회고 같은 게 그런 것이다.
그와 함께 세계화가 불가피하다 하더라도 무시무시한 '덫'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게 위기 10년에 한국이 명심해야 할 일이다.
데이비드 립턴이라는 사람을 기억하는가.
아마도 기억하는 이들이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인에게 그는 매우 중요한 사람이다.
립턴은 10년 전 한국의 외환위기 때 미국 재무부의 외무차관보였다.
10년 전인 1997년 11월21일 한국은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했다.
그러나 구제금융 신청보다 오히려 더 중요한 사건은 일주일 뒤인 28일 립턴의 내한(來韓)이 아닌가 싶다.
립턴이 온 뒤로는 사실상 IMF의 구제금융 업무는 그의 지휘를 받게 됐다.
립턴은 어떻게 해서 한국에 오게 됐는가.
그것을 아는 것이 외환위기 성격을 이해하는 첫걸음이다.
한국 외환위기의 직접적 원인은 무엇보다 '엔 캐리 트레이드 청산'이다.
1990년대 중반에도 일본의 금리가 엄청 싸서 한국의 은행들이 일본 은행들로부터 대거 자금을 빌렸다.
그 자금이 단기 자금이었던 것은 물론 한국 측의 잘못이었다.
그러다가 1997년 일본 국내에서의 금융 불안 등으로 일본 은행들이 자금을 회수하면서 위기가 시작됐다.
일본 은행들이 자금을 회수하기 시작할 때 한국 정부는 무얼 했는가.
팔짱만 끼고 있지는 않았다.
일본 정부에 일본 은행들이 한국에서 대출금을 회수하지 않도록 '행정 지도'를 하거나 외화를 빌려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일본의 답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내세운 이유는 일본 자체도 사정이 어렵다는 것이었지만,실제로는 미국이 압력을 넣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입장은 한국이 위기를 해결하려면 일본과 둘이서 할 것이 아니라 국제기구인 IMF에 가는 게 정도(正道)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주장은 IMF는 '최종 대부자(lender of last resort)'라는 사실과 맞지 않는다.
위기를 맞은 나라가 최대한 스스로 해결하고 안 될 때 가는 곳이 IMF 아닌가.
이것은 구제금융이라는 불확실한 일에 드는 자금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IMF의 최대 주주인 미국의 납세자 입장에서 보아도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미국 정부는 한국 스스로의 노력을 방해하고 IMF로 가도록 한 것이다.
미국이 그렇게 한 이유는 무엇인가.
한국의 위기를 이용해 그 전에 지속적으로 요구해도 한국이 들어주지 않았던 자본시장 개방 등의 요구를 관철시키려 한 것이다.
미국은 자신의 영향력 아래 있는 IMF가 그런 일을 잘하리라고 기대했지만,막상 IMF가 일하는 것을 보니 그렇지 못했다.
IMF 구제금융팀의 일부는 자본시장 전면 개방,고금리,전면적 구조조정 등 미국의 요구가 위기를 해결하는 방책이 못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사정 아래서 IMF 구제금융팀을 지휘ㆍ감독하기 위해 내한한 사람이 바로 립턴이었다.
1997년 가을에 발생했던 것은 외환위기 발발을 막고 일단 일어난 위기가 가져오는 손실을 최소화하려는 한국 측 노력이, 그 기회에 자신의 요구를 관철시키려는 미국의 의도에 종속되는 과정이었다.
립턴의 내한은 바로 그런 과정의 최종단계였다.
그러나 립턴의 지휘를 받은 IMF의 조치는 나가는 외자를 되돌리지 못했다.
결국 미국 정부가 나서서 채권 은행들에 '행정 지도'를 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었다.
일본 정부에는 못하게 했지만 스스로는 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미국의 요구가 100% 관철된 것은 물론이다.
올해 외환위기 10년을 맞아 많은 논의가 있었다.
그러나 그 결과와 관계없이 위기가 일어나는 과정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그 성격을 이해하는 관건(關鍵)이다.
이것은 반드시 미국이 잘못했으니 우리는 반성할 게 없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한국의 반성은 지극히 실용적인 것이어야 한다.
"위기 전 월스트리트 투자자에게 먹을 것을 좀 던져 주었어야 했는데,너무 움켜쥐고 있었다"는 당시 고위정책 당국자의 회고 같은 게 그런 것이다.
그와 함께 세계화가 불가피하다 하더라도 무시무시한 '덫'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게 위기 10년에 한국이 명심해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