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 英 珠(이영주) < 사법연수원 교수·검사 lyj1@scourt.go.kr >

사우디아라비아의 한 여성이 남자친구와 함께 차를 타고 가다 낯선 남자들에게 집단 성폭행을 당했다.

이에 법원은 남녀가 함께 있었다는 이유로 피해자인 여성에게 태형을 선고했고,피해자가 항소하자 오히려 형량을 더 높였다는 신문기사를 읽었다.

21세기에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어이가 없고,그 사회의 인권 수준이 얼마나 낮은지 실감했다.

이 기사를 읽은 사람들은 대개 나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좀 더 생각해보자.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피해자가 여성이라서 부당하게 비난받는 일은 우리 사회에도 있다.

최근 인터넷 포털사이트와 일부 신문에서 화제가 된 폭력사건이 일례다.

미디어도,네티즌도 유명 여가수에게 전 남자친구가 폭력을 행사한 배경을 꼬치꼬치 캐며 은연중,때로는 노골적으로 여가수의 '행실'을 문제삼았다.

일선 검찰청에서 근무할 때 주로 여성이 피해자인 성폭력이나 가정폭력 사건을 담당하면서 피해자들이 제2,제3의 피해를 입는 것을 종종 봤다.

대표적인 2차 피해는 위로와 격려 대신 범죄를 유발했다는 의심과 비난을 받는 것이다.

이 같은 일은 형사절차상의 문제점으로 지적되곤 하지만,피해자가 속한 사회의 편견이 빚어내는 현상으로 이해하는 게 보다 정확할 것이다.

범죄를 수사하다 보면 아무 잘못 없이 난데없는 피해를 입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범죄 피해자에게 책임이 전혀 없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대부분의 폭력 피해자는 가해자를 격분시킬 말이나 행동을 하고,절도 피해자는 창문을 열어놓은 채 잠을 자는 식이다.

특히 사기사건에서는 부당한 이득에 편승하려다 피해를 입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도 주변에서 그런 일이 생기면 보통은 피해자의 잘잘못에 주목하기보다는 범죄 행위를 비난하고 피해자가 겪는 불행을 함께 걱정한다.

그런데 피해자가 여성인 경우 이야기는 달라진다.

절도 피해자에게 "문단속 좀 잘 하지",사기 피해자에게 "거래하기 전에 좀 더 확인해보지"하는 식으로 기껏해야 안타까움을 표현한다면,성폭력 피해자에게는 "왜 밤늦도록 가해자와 술을 마셨느냐",가정폭력 피해자에게는 "왜 남편에게 말대꾸를 했느냐"고 책망한다.

매사 조심하는 게 좋다.

그러나 '여자니까' 당할 수 있는 피해들을 염두에 두고 방어해야 한다는 관점은 너무 진부하다.

같은 취지에서 '여성들의 밤길을 되찾자'는 캠페인을 전개하는 여성단체도 있다.

다른 나라의 극단적 판결과 그 판결 저변의 편향된 인식을 보면서 우리는 과연 얼마나 다른지 돌아볼 일이란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