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이 국회가 이송한 지 단 하루 만인 27일 '삼성 비자금 특검법'을 수용하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당초 공직부패수사처와 특검법 처리를 연계하겠다며 거부권을 시사했던 것에 비해 지나치게 빨리 '꼬리를 내린' 셈이다.

이날 노 대통령의 기자회견 직전에 열린 국무회의에서도 주무부처인 법무부는 특검법의 명백한 하자를 이유로 재의 요구를 해야 한다는 강경 대응을 건의했고,다수 청와대 참모들도 이에 동조했다.

정성진 법무장관은 "수사 대상 등이 위헌적 요소가 다분하고,'삼성그룹'이라는 수사 대상 기업의 범위가 불명료하며,단순한 의혹 제기 단계에서 특검을 도입하는 것은 예외적,보충적으로 도입돼야 특검제의 기본 취지에 반한다"고 거부권 행사를 의견으로 제출했다.

이어 국무위원 8명도 대부분 재의 요구에 무게를 실었다.

그럼에도 노 대통령은 여론과 거부권 행사에 따른 정치적 부담 등을 고려해 특검 수용 결정을 내렸다.

"찬성표가 압도적으로 많은 상황에서 재의 요구를 한다고 해서 달라질 가능성이 낮은데 정치적 논란과 비용을 감수하고 특검법의 부당성을 다퉈야 할 정치적 이득이 없다"는 것이다.

특검법안이 대통합민주신당과 민주노동당 창조한국당 등 3당안에 한나라당 의견을 반영한 수정안인 만큼 국회가 재의결할 가능성이 높은 만큼 거부권 행사의 실효성 자체가 없다는 의미다.

거부권 행사에 호의적이지 않은 여론도 부담으로 작용했다.

최근 여론은 특검법안 자체에 설사 위헌적 요소가 있더라도 '삼성 비자금'의 조성 경위와 용처를 밝혀내야 한다는 쪽에 무게가 실려 있는 상황이다.

자칫 거부권을 행사했다가 '청와대-삼성 유착설'을 확산시켜 "당선 축하금 수사를 피하려는 것 아니냐"는 역풍을 맞을 수도 있다.

노 대통령이 "여론이 압도적으로 돌아가 버렸다"고 언급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노 대통령은 그러나 "국회의원의 횡포와 지위의 남용"이라며 이번 특검법의 부당성과 함께 정치권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노 대통령은 "다리가 있으면 다리로 다니면 되는데 나룻배를 띄우려고 한다"면서 공직부패수사처법에 대한 각 당의 철저한 무시를 지적했다.

노 대통령은 "특검은 다수당의 무기이며 국회가 이번처럼 결탁해서 대통령을 흔들기 위해서 만들어낼 때만 가능하다"며 "특검이 국회의 필요에 따라 언제든지 끄집어낼 수 있는 남용의 도구가 돼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특히 당선 축하금이 수사 대상에 포함됨으로써 노 대통령 스스로 서명한 법에 의해 본인이 조사받을 수도 있는 상황이 초래된 점에 대해서는 강한 분노감을 피력했다.

노 대통령은 "순수하게 삼성 특검이라면 '대통령 흔들기'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수사의 단서는 의혹의 단서보다 구체적이어야 하는데 의혹의 단서도 너무나 모호하다"고 비난했다.

이번 특검법의 본질이 '당선 축하금'이 아닌데도 마치 이를 특검법 수용 여부를 결정하는 기준인 것처럼 정치권이 몰아가고 있는 데 대한 불만인 셈이다.

이심기 기자 sg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