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발을 다 묶어놓고서 내년 사업을 어떻게 하라는 건지 정말 모르겠다."(삼성그룹 A상무)

"의혹을 푸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룹 핵심 경영진을 죄다 출국 금지시키는 게 능사는 아니지 않느냐."(삼성전자 B부사장)

27일 삼성그룹은 말 그대로 '초비상' 분위기였다.

검찰이 김용철 변호사가 제기한 차명계좌에 대한 압수수색에 들어간 데 이어 노무현 대통령이 특별검사제 도입을 수용함에 따라 삼성은 내년 4월 이후까지 검찰-특검의 릴레이 수사망에 포위돼 가위눌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특히 검찰이 전날 이건희 회장 등 그룹 수뇌부 8∼9명에 대해 출국 금지 조치를 단행하자 임직원들은 "경영 차질이 현실화되고 있다"며 잔뜩 몸을 낮추고 있다.


◆6개월은 '검찰과 특검 경영'

삼성은 '김용철 발(發)' 의혹 제기로 그룹 수뇌부까지 출국 금지 조치를 당한 데 대해 "제기된 의혹들에 대해서는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 때문에 성실하게 수사를 받겠다"는 공식 입장을 밝히고 있다.

하지만 내부적으로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사실 김용철 변호사의 잇단 의혹 제기 때까지만 해도 삼성그룹 내부 분위기는 "설마 경영 차질을 빚겠느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막상 이 회장 등 수뇌부들이 출국 금지를 당하자 "내년 그룹 경영이 완전 마비될 상황이 올 수 있다"며 위기경보를 발동하고 나선 모양새다.

그룹 관계자는 "검찰 입장에서는 수사를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한 것이겠지만,의혹 제기만으로 도주 우려도 없는 기업인들에 대해 출국 금지를 해야만 하느냐"며 "출국 금지 사실 자체만으로 해외 거래선들로부터 '기피인물' 취급을 받지 않을까 걱정"이라고 말했다.

실제 노무현 대통령의 특검 수용으로 삼성은 현재 진행 중인 검찰 수사에 이어 연말께 특검수사가 시작되면 이 회장 등 그룹 수뇌부 8∼9명은 내년 5월까지 출국 금지 상태를 면치 못할 가능성이 크다.

여기에 검찰 또는 특검에서 추가로 그룹 핵심 계열사 최고경영자(CEO)와 고위 임원들에 대한 출국 금지 조치를 내릴 경우 경영 공백 사태가 그룹은 물론 전 계열사로 번질 수 있는 상황이다.


◆삼성,"경영 손발 묶였다"

당장 내년 초부터 경영 공백이 가시화될 전망이다.

우선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인 이 회장은 베이징올림픽에 앞서 내년 상반기 중 열리는 IOC총회 참석이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이 회장의 IOC총회 불참은 삼성뿐 아니라 국가 차원의 대외 신인도 하락을 불러올 수 있다는 게 재계의 지적이다.

또 이 회장이 매년 상반기에 해외에서 열었던 그룹 전략회의도 전면 취소될 것으로 보인다.

그룹 관계자는 "이 회장은 연간 100일 정도를 해외에서 머물면서 해외 기업의 CEO를 만나고 삼성의 미래 신수종사업 등을 고민한다"며 "현재로선 내년 상반기의 모든 접견 계획을 취소할 수밖에 없다"고 전했다.

올해 초 삼성전자의 CCO(최고고객책임자)를 맡아 이 회장을 대신해 해외 주요 거래선들을 만나고 있는 이재용 삼성전자 전무도 내년 경영 활동에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특히 이 전무는 매년 1월 초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리는 소비자가전쇼(CES)에 참석해 스티브 잡스 애플 CEO 등 핵심 거래선들과 만나 향후 중장기 협력 방안을 논의해 왔지만,이번 출국 금지로 내년 초 CES 참석은 불가능하게 됐다.

이학수 전략기획실장(부회장)과 김인주 사장 등 그룹 수뇌부의 공백도 무시못할 문제라고 삼성은 걱정한다.

그룹의 재무와 신사업 기획을 맡는 전략기획실 팀장들이 모두 검찰에 불려다닐 상황이기 때문이다.

재계와 법조계도 이 같은 문제점을 우려하는 분위기다.

이승철 전경련 전무는 "확인되지 않은 한 개인의 주장만 믿고 세계적인 경영인으로 존경받는 그룹의 총수를 출국 금지시키는 것은 이 회장을 잠재적 범죄자로 인정하는 것 아니냐"며 "검찰 수사 결과와 관계없이 삼성과 이 회장이 받을 타격이 너무 클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A변호사는 "의혹 제기만으로 구체적인 물증도 없이 기업 경영인들을 출국 금지하는 것은 선례가 없는 일"이라며 "출국 금지는 해외를 수시로 드나드는 기업인들의 경영 활동을 제한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태명/유창재/김현예 기자 chihir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