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창현(尹暢賢) < 서울시립대 교수·경영학 >

외환위기 이후 우리 경제의 중요한 화두(話頭) 중 하나가 바로 외자유치였다.

외환위기가 극복돼 가던 무렵 코스닥 버블이 극성을 부렸을 때 기업 내용과 별 상관없이 특정 기업에 외국법인이 투자했다는 뉴스만 전해지면 해당 기업 주가가 엄청나게 상승하는 일이 많았다.

그런데 이들 외국법인 중 많은 경우가 조세회피지역에 등록된 서류상 회사(paper company) 수준의 펀드들이었고 이름만 가지고는 정체를 알 수 없도록 돼 있었다.

우리나라 주식을 취득한 외국법인의 소재지 중에서 미국이나 싱가포르 같은 국가와 함께 케이만군도나 버진아일랜드라는 생소한 이름이 떠오른 것도 이 때다.

케이만과 버진아일랜드는 카리브해 근처에 위치한 유명한 조세회피 지역이다.

그러자 부작용이 나타났다.

한국 돈을 조세회피지역으로 빼돌려 외국법인으로 조작한 후 외국인 투자 유치라는 재료를 만들어내는 기법이 생겨난 것이다.

바로 '검은 머리 외국인' 투자기법이었다.

이 기법의 원조는 지금은 해외 도피 중인 K씨일 것이다.

그는 국내 G사의 지분을 취득한 후 이 회사가 해외 전환사채 발행을 하도록 하고 이 전환사채를 말레이시아의 라부안이라는 조세회피지역에 설립된 외국법인이 인수하도록 했다.

G사의 주가는 엄청나게 폭등했다.

그런데 G사 주식을 사들인 외국법인은 바로 그가 주도해 설립한 회사,즉 검은 머리 외국인이었다.

G사의 해외전환사채를 싼 값에 인수한 이 해외법인은 전환사채를 주식으로 전환한 후 이를 비싸게 팔아서 엄청난 차익을 올렸고 이 과정에서 뒤늦게 소문만 믿고 G사 주식을 매입한 투자자들이 엄청난 손실을 기록했다.

2002년 12월 홍콩 소재 모 투자사가 국내 S주식에 대해 대량의 매수주문을 낸 후 이 주식의 가격이 오히려 떨어지자 매입대금을 납입하지 못한 채 관계자들이 도주한 사건이 있었다.

이 투자자문사의 주요 관계자 중 한 명이 바로 1997년 체결돼 국내회사들에 엄청난 손실을 입힌 토털리턴 스와프계약을 주도한 인물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 회사는 홍콩에 법인을 설립하고 펀드를 조성해 국내주식에 투자했는데 이 법인이 검은 머리 외국인역할을 하면서 외국인 투자유치로 주가조작을 해 큰 이득을 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결국 이 기법을 너무 남용(濫用)하다가 실패를 본 것이다.

최근 문제가 불거지는 BBK 사건에서도 이런 기법이 등장한다.

전체 구조는 매우 복잡하지만 큰 그림은 비슷하다.

우선 BBK를 설립해 차익거래라는 선진금융기법을 구사한다는 구실로 투자를 유치한다(사실 차익거래는 시장가격의 불균형을 이용해 안전하게 수익을 올리는 기법이므로 그다지 큰 수익을 내기는 힘들다).그리고는 이 자금을 해외로 빼돌려 MAF라는 역외펀드를 조세회피 지역인 영국령 버진아일랜드에 설립한 후 이를 이용해 광은창투(옵셔널벤처스) 주식을 사들이면서 외국인 투자유치를 재료로 주가조작을 주도한다.

전형적인 '검은머리 외국인' 투자 기법이다.

이러한 기법은 외환위기의 산물이었다.

외환위기 이후 우리가 미처 준비하지 못한 상태에서 급격한 자본시장 개방이 이뤄지면서 해외자본이 엄청나게 쏟아져 들어왔고 이 과정에서 달러 부족으로 위기를 겪은 경험이 외국자본 및 외국인 투자자에 대한 기대감을 형성시킨 것이다.

이를 주도한 인물들은 주로 해외에서 공부하고 해외금융기관 근무 경력을 가진 한국인들이었다.

결국 이들은 외국자본에 대한 투자자의 기대심리를 이용해 부당한 이득을 챙긴 것이고 이들을 믿고 돈을 맡기거나 투자한 국내투자자들은 여러 가지로 커다란 피해를 보았다.

이제 우리 금융산업은 많이 성숙했다.

그러나 그럴수록 더욱 금융기법을 연구하고 고도화 시키고 금융산업이 발전하도록 뒷받침을 할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더 이상 이런 기법이나 인물들이 국내에 발붙일 틈이 없도록 부단히 노력을 해야 할 때다.

/바른금융재정포럼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