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 英 珠(이영주) < 사법연수원 교수·부장검사 lyj1@scourt.go.kr >

사법연수원의 주된 기능은 사법연수생 수습이지만,또 다른 기능 중 법관 연수가 있다.

지난주에는 내년 초 부장판사가 되는 사법연수원 동기 판사들의 연수가 있었다.

검사가 된 연수원 동기들은 이미 몇 년 전 부장검사가 됐으니 법원은 부장 승진이 느린 셈이다.

연수를 온 동기 판사 중 대학 동창 몇몇과 오랜만에 점심식사를 함께 했다.

밥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각자 모시고 일하는 선배들이 화제가 됐는데,저마다 칭찬이 이어졌다.

어떤 선배는 인품이 훌륭하고,어떤 선배는 해박하고,어떤 선배는 아이디어가 샘솟는다는 등 선배들의 장점에 관한 다양한 의견이 나왔다.

그러나 일을 열심히 해서 후배들도 따라서 분발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는 데서는 의견이 일치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해 좋은 얘기만 하기란 흔치 않은 일일텐데 대화가 그렇게 진행된 것은 ,동창들이 곧 부장판사가 돼 한 부를 이끌어갈 입장이 되니 관리자의 관점을 갖게 되고,그들의 눈에 선배들의 장점이 새삼 돋보였기 때문인 것 같다.

같은 맥락에서 '선배 모시기보다 후배 모시기가 더 어렵다''부장이 되면 벙커 배석을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등의 이야기도 오갔다.

'벙커'는 법원의 판사들 사이에서 쓰이는 은어다.

주로 후배 판사들을 심하게 다그치는 부장판사를 골프코스에 있는 모랫구덩이 '벙커'에 견주어 '벙커 부장'이라고 한다.

벙커 부장은 다시,자신도 열심히 일하면서 후배들에게도 일을 많이 시키는 '좋은 벙커'와 정작 자신은 게으르면서 업무와 무관하거나 불필요한 일로 후배들을 괴롭히는 '나쁜 벙커'로 나눠진다.

리더십과 관련해 생각하면,'나쁜 벙커'는 우월한 지위를 내세워 후배들에게 일방적으로 지시만 하는 권위적 리더라고 할 수 있다.

후배들에게 모범을 보이고 끊임없이 독려한다는 점에서 '좋은 벙커'야말로 바람직한 리더다.

좋은 벙커가 많아야 개인도,조직도 발전한다.

돌이켜보니 나는 지금까지 운이 좋아서,판사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나쁜 벙커를 만나지 않았다.

이런저런 이유로 그저 편하게 배려해 주기만 한 선배는 더러 있었다.

그런 선배보다 당장은 힘 들더라도 높은 목표를 설정해 과제를 많이 부과하고,그걸 달성하기 위해 함께 노력한 선배가 훨씬 기억에 남고 고맙게 생각된다.

앞으로도 나쁜 벙커는 만나지 않길 바란다.

아울러 늘어나는 후배들에게 밀려 점점 선배 대접을 받게 되니,나 자신이 후배들에게 좋은 벙커가 됐으면 하는 희망이 하나 더 늘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