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일 낮 서울 동대문구 홍릉 연구단지에 위치한 KDI국제정책대학원.영하의 날씨 속에 바람까지 불어 낙엽이 뒹구는 캠퍼스는 황량했으나 강의동으로 들어서자 뜨거운 학습열기가 느껴졌다.

마침 학기말 시험 주간이라 복도를 오가는 학생들의 얼굴에는 잔뜩 긴장감이 배어있었다.

교실 안을 들여다 보니 시험을 치르는 많은 학생들이 외국인인게 눈길을 끌었다.

바쁜 시간을 쪼개 구내 식당에서 만난 세 명의 외국인 유학생들은 마치 대입 시험장에 나온 수험생들처럼 바짝 움츠러든 모습이었다.

"시험 기간이라 정신이 없네요. 오후에 시험이 있어 마무리 정리를 해야 합니다."

정책학(MPP) 석사과정에 재학 중인 페루 출신의 핀타도 에스피노자 엔리크씨(31)는 마지막 시험을 잘 봐야 귀국할 수 있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이들은 KDI국제대학원 측이 우수 학생으로 추천한 엘리트 젊은이들로 '한국 경제'의 성공 비결을 배우고 있다.

페루에서 온 엔리크씨는 입사 7년차인 국세청 공무원으로 2월 초 한국에 왔다.

튀니지 출신 여학생인 달리 아미라 벤트만수르씨(27) 역시 외교부 소속 공무원이다.

한국생활 5년차인 바타라이 라잔씨(27)는 네팔에서 대학을 마쳤으나 한국 대학에서 다시 경제학을 전공한 뒤 현재 KDI국제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 과정을 밟고 있다.

제3세계 출신인 이들은 모두 '한국'을 제대로 배워 고국의 경제성장에 기여하겠다는 꿈을 갖고 왔다.

다른 많은 선진국을 나두고 굳이 한국을 유학 대상지로 택한 이유가 궁금해 물어봤다.

"남미 국가들 입장에서 빠른 시간 내 경제 개발에 성공한 한국은 훌륭한 벤치마킹 모델입니다.

1970년까지만 해도 우리보다 못살던 한국이 어떻게 세계 최고 수준의 하이테크 기술을 가진 선진국으로 발전했는지 궁금했습니다.

" 세무 공무원인 엔리크씨는 한국 경제가 고속 성장한 뒤 1997년 발생한 외환위기에서 성공적으로 탈출한 대응 방안에도 관심이 많다고 말했다.

외교관인 아미라 벤트만수르씨는 "개도국에서 성공 신화로 평가받는 한국에서 국제관계학을 연구하고 귀국하면 업무에 도움이 되는 것은 물론 앞으로 개인의 경력관리에 유용할 것으로 판단했다"고 대답했다.

MBA 과정에 다니는 라잔씨는 "경제가 낙후된 네팔은 여러 분야에서 한국으로부터 배울 게 많다"며 "한국과 네팔 간 비즈니스가 늘어나면 돈벌 기회도 많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짧게는 1년,길게는 5년 정도로 한국 체류 기간은 달랐지만 세 명 모두 '한국 사랑'은 철철 넘쳤다.

이들은 한국에 오기 전만 해도 세계 10위권의 무역 규모를 가진 국가로만 알았으나 막상 와보니 아름다운 자연과 역사를 가진 나라라고 입을 모아 칭찬했다.

또 한국은 폐쇄적인 나라라는 편견을 갖고 있었으나 실제 생활해 보니 사회가 오픈돼 있고 활기가 넘쳐 놀랐다고 밝혔다.

엔리크씨는 "한국전쟁 직후 세계 최빈국이던 한국이 선진국 대열에 진입한 것은 '기적'같은 일"이라면서 "한국인들은 처음 만나면 수줍어 하지만 사귈수록 정이 많고 화통한 게 정말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

대학 측에서 불편함없이 공부하도록 지원해주고,주변 한국인들도 너무 친절해 한국 생활에 전혀 어려움이 없다고 세 사람 모두 만족해 했다.

그래도 한국에 대한 '고언'을 한마디 해달라고 했다.

아미라 벤트만수르씨는 "튀니지에선 아직 아시아하면 중국이나 일본밖에 모르는 사람이 꽤 있다"며 "한국이 외교에서 좀더 다양한 국가와 관계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엔리크씨는 "한국 경제는 급속히 발전해 왔으나 시장개방과 중국의 부상으로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다"며 시급히 돌파구를 마련해야 할 것이라는 의견을 냈다.

이들은 한국에서의 경험을 살려 고국의 경제 발전에 기여하고 싶다고 입을 모았다.

라잔씨는 한국의 앞선 비즈니스를 배워 네팔에서 큰 사업가로 성공할 것이라고 자신했다.

아미라 벤트만수르씨는 국익에 기여하는 훌륭한 외교관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기회가 되면 주한 튀니지 대사를 하고 싶다고 희망했다.

엔리크씨는 세무공무원답게 투명하고 효율적인 세제 등 한국의 선진 행정 시스템을 벤치마킹해 페루 발전에 도움을 주고 싶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세 명은 모두 한국국제협력단 등 한국 기관의 경제적 지원으로 좋은 경험을 하게 됐다고 거듭 고마워했다.

제3세계 출신의 젊은이들이 한국을 이해하고, 배울 수 있게 더 많은 기회가 제공됐으면 좋겠다는 뜻도 밝혔다.

'한국팬'이 된 이국의 젊은 엘리트들을 보면서 우리의 미래가 어둡지만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최인한 기자 janu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