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의를 인정하면 풀어줄 수 있느냐"(김경준 전 BBK 대표)

"한국 검찰은 플리바겐 권한이 없다"(최재경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장검사)

주가 조작 및 횡령 혐의로 구속 기소된 김경준씨가 검찰과의 '협상'을 시도했느냐는 논란이 불거지면서 '플리바겐(Plea Bargain·형량 협상)'에 대한 관심이 새롭게 높아지고 있다.

피의자가 혐의를 인정하는 조건으로 검찰이 가벼운 범죄로 기소하거나 형량을 낮춰 주는 플리바겐은 지난해 사법개혁법안 도입 과정에서 검찰이 지속적으로 도입을 요구했던 제도.그러나 사법 정의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아 논란이 거듭되고 있다.


국내에는 아직 플리바겐이 정식 도입되지 않았지만 검사와 피의자 사이에 은밀한 협상이 이뤄지고 있다는 게 공공연한 비밀이다.

특히 불법 정치자금 수수나 뇌물 사건처럼 증거 확보가 어려운 수사가 진행되면 검사들은 구형량을 낮춰 주는 대신 자백하도록 피의자들을 '설득'하기도 한다.

검찰은 공판중심주의 정착을 위해서도 플리바겐이 제도로서 도입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조근호 사법연수원 부원장은 "수사 및 재판에 들어가는 인적 물적 자원 낭비를 없애기 위해서는 플리바겐과 사법방해죄,증인보호 프로그램 등이 공식적으로 도입돼야 한다"고 말했다.

플리바겐은 혐의를 인정하는 사건이 빨리 처리되도록 해 혐의를 부인하는 극소수 사건에만 수사와 재판을 집중시키는 장점이 있다.

미국의 경우 형사 소송의 90%가 플리바겐을 통해 해결되고 있다.

검사 입장에서는 형사 재판의 무죄 판결률이 20~30%로 높은 현실에서 피고인과 적당히 타협해 쉽게 유죄를 이끌어 내려는 성향이 강해질 수밖에 없다고 한다.

피고인들 입장에서도 일단 재판에 회부(기소)되면 높은 변호사 수임료 등을 부담해야 하기 때문에 무죄 판결을 받더라도 경제적 손실이 만만치 않아 차라리 웬만하면 플리바겐으로 넘어가려 든다.

플리바겐은 또 마약 조직범죄 등 거대 범죄를 척결하는 데도 효과가 있다.

협상을 통해 범죄 조직원을 기소하지 않는 대신 그로부터 범죄 행위를 직접 하지 않으면서 뒤에서 지시하는 두목이나 거물급 인사들에 대한 증언을 확보할 수 있어서다.

플리바겐이 효과를 보기 위해서는 증언했던 조직원이 보복당하지 않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해 주는 증인보호 프로그램이나 검찰에서 혐의를 인정했다가 재판 단계에서 진술을 뒤집을 경우 수사를 방해했다는 이유로 중형에 처하도록 하는 사법방해죄의 신설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국가 권력인 검찰과 사법부가 범죄자와 형량을 흥정한다는 것은 사법 정의에 위배된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범인이 자신의 큰 범죄는 숨기고 작은 범죄만 인정해 최소한의 법적 처벌을 받음으로써 사실상 면죄부를 받을 수 있어서다.

또 거물급을 처벌하기 위한 증언을 확보한다 하더라도 범죄 조직원이나 뇌물 제공자를 처벌하지 않는 것은 옳지 않다는 주장이 있다.

검찰이 현재 기소 재량권을 남용하고 있어 플리바겐 도입은 시기상조라는 의견도 제시된다.

지난 2월 다단계 판매업체 제이유그룹 사건을 수사하던 서울동부지검이 피의자에게 거짓 자백을 강요해 파문이 일기도 했는데 해결되지 않는 미제 사건이 쌓이면 적당히 수사하고 덮어 버리려는 도덕적 해이 현상이 검사들에게 일어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정태웅 기자 redae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