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환(李悳煥) < 서강대 교수·과학커뮤니케이션 >

우리 학생들의 과학 성취도가 크게 추락했다는 PISA(학업성취도국제비교연구) 보고서에 대한 과학기술계의 반응이 이상하다.

평균이 떨어진 것보다 과학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우수 학생이 1.1%에 불과한 것이 더 심각한 문제라고 여기는 모양이다.

우수 학생이 줄어들면 우수 과학자를 양성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요즘 우리 과학기술계에 이상한 '선민'(選民) 의식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과학의 세상에서는 오로지 1등만이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걱정하는 이공계 기피의 핵심은 '양'(量)이 아니라 '질'(質)이라고 주장한다.

고등학교에서 자연계 학생이 줄어드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1등이 대학의 의약학 계열로 진학하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아예 이공계 대학의 정원을 축소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어차피 2등 학생으로 채워진 이공계 학과는 과학 발전에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엄청나게 잘못됐고,지극히 위험한 생각이다.

우선 과학이 1등만에 의해 유지되고 발전한다는 생각은 사실과 크게 다르다.

물론 교과서에는 1등의 이름만 남는다.

그러나 1등만에 의해 유지되는 사회는 있을 수가 없다.

2등이 있어야 1등이 있는 법이다.

과학기술계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모든 과학자가 첨단 과학에만 매달릴 수는 없다.

특히 대규모 기술 개발의 경우에는 수많은 2등이 필요하다.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라도 그것을 실현시켜줄 수 있는 충분한 수의 기술인력을 찾지 못하면 그림 속의 떡이 될 수밖에 없다.

미래의 과학자를 길러내는 일에서도 마찬가지다.

연구에만 매달리는 스타 과학자가 반드시 '진짜' 훌륭한 교수가 되는 것은 아니다.

스타 과학자로 채워진 미국의 대규모 연구중심대학이 교육에서는 작은 교육중심대학에 뒤지고 있는 것이 그 증거다.

모든 과학자가 천재라는 인식도 사실과 다르다.

실제로 역사에 이름을 남긴 과학자들이 모두 천재였던 것은 아니다.

신동(神童)이나 과학영재에 매달리는 과학계의 모습이 학생들에게 이공계를 외면하도록 만드는 직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우리처럼 학생들의 진짜 재능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려운 교육 환경에서는 더욱 그렇다.

이공계 출신 모두가 과학자나 기술자가 되는 것도 아니다.

기업이나 공직에서 이공계 출신이 해야 할 일은 너무나도 많다.

이공계 출신만이 할 수 있는 일도 많다.

앞으로 우리 사회가 진정한 선진국으로 발전하려면 평범한 이공계 출신이 더욱 많아져야만 한다.

이공계 출신이 반드시 사회지도층이 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영국의 대처나 중국의 후진타오는 과학 영재도 아니었고,훌륭한 과학자도 아니었다.

오늘날 과학은 민주 시민이 반드시 갖추어야 하는 필수 소양이다.

오늘날 사회적으로 중요한 의제(議題)는 거의 대부분 과학과 직접 또는 간접으로 관련될 수밖에 없다.

그런 의제에 대해 스스로 독자적인 의견을 제시하거나 선택하려면 상당한 수준의 과학적 소양이 필요하다.

현대의 과학은 똑똑한 과학자의 전유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과학자로 성장할 자질이 없는 학생들에게도 과학을 가르쳐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이공계 대학의 정원은 오히려 더 늘릴 필요가 있다.

중하위권 대학의 이공계 학과가 아무 쓸모가 없다는 생각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뒤늦게라도 과학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학생을 내칠 이유도 없다.

충분히 많은 기회가 주어지면 풍월을 읊게 될 수도 있다.

그런 풍월이 어설프다고 비난할 일이 아니다.

과학기술중심사회에서는 누구나 과학에 대해 어설픈 풍월이라도 읊을 수 있어야 한다.

더욱이 중등학교의 과학 교육은 과학자 양성을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다.

과학을 과학자가 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학생에게만 가르쳐야 하는 것도 아니다.

모든 학생이 상당한 수준의 과학적 풍월을 읊을 수 있도록 만들어야만 한다.

유능한 과학자 양성은 별개의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