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학자들의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인간이 할아버지,할머니와 같이 살게 된 것은 약 3만년 전부터다.

당시 수명이 갑자기 늘어나면서서 사람들은 3대가 가족을 이뤄 살 수 있게 됐다.

할머니가 딸뿐만 아니라 손녀까지 가르칠 수 있게 되면서 가사문화가 자라나기 시작했다.

할아버지도 젊은 손자를 '옛날 방식'으로 지도하게 돼 세대를 이어가는 전통이란 것도 생겨났다.

인류학자들이 '조부모 현상'이라고 부르는 이 변화는 인류 역사상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조부,조모와 함께 살게 된 덕분에 젊은이 집단의 공격적인 성향이 많이 완화돼 부족 간 전쟁이 크게 줄었다.

전쟁에 대한 긴장감이 줄어 에너지를 비축한 사람들이 내부로 눈을 돌리면서 문화수준도 덩달아 향상되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1989년은 의미있는 해다.

이때부터 미국에선 40대 이상 인구가 절반을 넘었다.

문화의 주류가 40대 이상이 된다는 것은 그 사회가 투쟁이나 격정보다는 화해와 친절 등의 키워드로 바뀐다는 것을 뜻한다.

이전 시대보다 협상이나 절차를 중시하는 태도가 훨씬 유행하게 돼있다.

40대 중년과 20대 청년은 세상을 다르게 본다.

가장 큰 차이는 40대부터는 '의미'를 찾는다는 점이다.

즉각적으로 반응하기보다는 전체와의 연관에서 생각하고 특히 자신의 인생과 관련지어 보는 경우가 많다.

가족 사회 나라 세계,그리고 역사를 생각하는 것은 청년층이 아니라 중년층 이상의 특성이다.

미국에서 고객이나 주주중심의 경영을 넘어서 지역사회와 종업원,파트너까지 포함하는 이해당사자(stakeholder) 관계 경영이 부상하고 있는 데는 이런 배경이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어떨까.

우리 사회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고령화돼가고 있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실제 40세 이상의 인구 분포 변화를 봐도 속도는 놀랍다.

통계청의 인구총조사 자료를 분석해보면 1990년에 26.9%에 불과했던 40세 이상 인구 비중이 30.6%(1995년),35.7%(2000년)를 거쳐 2005년에는 41.8%에 달했다.

5년마다 5%포인트가량 상승하고 있어 10년 내 중장년층이 인구 절반을 넘게 된다.

젊은층에게 이번 대선은 '재미 있는' 선거였을지도 모른다.

서로 치고받는 갈등에서 새로운 에너지를 찾아내는 것은 젊은이들의 문화다.

그러나 이번 대선에 대한 사회적 정서는 실망감이었다.

눈살을 찌푸리며 폭로나 싸움에 실망하고 화해와 의리와 같은 코드를 아쉬워하는 성향이 이번만큼 표출된 때는 없었다.

이것은 결국 이제 우리 사회의 중심연령이 중장년층 이상으로 크게 이동했다는 징표에 다름 아니다.

인구구조는 '경영학의 아버지' 피터 드러커가 '가장 확실한 혁신의 원천'이라고 말할 정도로 중요한 변화다.

대선에서 나타난 이 변화를 단순히 고령화,보수성향 등으로 봐선 안된다.

인생의 의미,사회의 의미,나라의 의미를 고민하고 생각하는 태도가 시대적인 코드로 자라나고 있다고 보는것이 옳다.

'우리 시대에 정말 선진국을 만들어 물려주고 싶다'는 다소 거창하지만 나름대로 의미있는 시대적 요구를 대선을 통해 확인한 것이다.

이 '중장년 현상'을 도약의 에너지로 활용하는 지혜를 새 대통령이 발휘해주기를 기대한다.

권영설 한경 가치혁신연구소장 yskw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