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민(李濟民) < 연세대 교수·경제학 >

노벨상 수상자인 스웨덴의 경제학자 군나르 뮈르달은 국가를 경성국가(硬性國家)와 연성국가(軟性國家)로 나누었다.

경성국가는 스스로 결정한 정책을 시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국가인 반면 연성국가는 그런 능력이 없는 국가다.

뮈르달은 연성국가의 대표적 예로 50∼60년대 인도를 들고 그것이 인도의 근본적인 문제점이라고 했다.

인도가 연성국가라면 대표적 경성국가로는 중국을 떠올리게 된다.

중국은 한번 결정한 정책은 어떤 형태로든 시행이 된다.

근자에 인도도 고도성장을 하고 있지만 중국만큼 외부의 평가를 받지 못하는 것은 무엇보다 인도의 연성국가적 성격 때문이다.

중국과 인도의 국가 성격이 이렇게 다른 이유는 무엇보다 중국의 정치가 권위주의인데 반해 인도의 정치는 민주주의이기 때문이다.

공산당이 일사불란하게 통치하는 중국과 국민의 교육수준이 낮고 중산층도 빈약한 바탕 위에서 민주정치를 하고 있는 인도가 같을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뒤집어 보면 장기적 관점에서 중국보다 인도가 더 유리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중국은 언젠가는 민주화 격랑을 타고 넘어야 하지만 인도는 그런 걱정이 없다.

중국과 인도의 이야기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중국이 장래 안고 있는 민주화와 경제발전 문제에 대해 답을 줄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사례가 바로 한국이다.

60∼80년대 한국이 다른 개도국보다 먼저 고도성장을 한 데는 박정희ㆍ전두환 두 대통령의 권위주의 통치하에서 경성국가가 성립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그러던 것이 87년 민주화 이후 한국의 국가가 연성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 한국민은 현 정부의 무능에 질린 상태지만,국가의 연성화에 대해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훨씬 오래 전부터다.

'물'이라는 별명을 가진 6공(共) 정부로부터 대통령이 경제에는 아무 관심도 없었던 문민정부 시대를 거치면서 국민은 누가 과거와 같은 시행 능력을 가지고 경제성장을 이끌어줄 것인가에 관심을 가졌다.

97년 대선에서 이인제 후보가 뜬 이유가 바로 박정희 대통령을 연상시킨다는 것 아니었는가.

그런 상태에서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국민의 정부가 국제통화기금(IMF)의 압력을 빌려 개혁하겠다고 나서자 그래도 무엇이 되는가 싶어서 지지를 보냈지만,결과는 막대한 '국부 유출'만 일어났을 뿐 새로운 성장 동력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국민의 정부를 이은 참여정부는 토론으로 날을 보냈다.

그렇다고 현 시점에서 민주정치를 포기하고 과거의 권위주의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한국인은 없을 것이다.

지금 한국민이 바라고 있는 것은 '민주적 경성국가'의 출현이다.

이번 대선에서 국민이 이명박 당선자를 압도적으로 지지한 것은 그의 추진력으로 보아 그런 일을 해낼 수 있다고 기대했기 때문일 것이다.

문제는 이 당선자가 특유의 추진력을 어떤 식으로 쓸 것인가이다.

이번 대선이 정책 선거가 되지 못했고,처음부터 선두를 지킨 이 당선자의 경제정책은 다분히 여러 이익집단을 모두 만족시키려는 '전략적 모호성'을 띠고 있었다는 인상이 짙다.

그런 중에 눈에 띄는 것은 '한반도 운하'처럼 과거 개발시대 정책을 연상시키는 공약이다.

지금 한국에서 시급한 일은 성장 동력 회복이지만.그것이 과거회귀식으로 이뤄져서는 결국 장기적 성장잠재력을 희생해서 단기적 성과를 내는 데 불과할 것이다.

새로운 성장 동력은 기존의 제도와 관행을 고쳐 선진적 시장경제를 건설함으로써 만들어야 한다.

'민주적 경성국가'를 건설하라는 것은 이 당선자에게 맡겨진 '역사적 과제'다.

역사적 과제의 본질은 항상 변한다는 것이다.

과거 개발시대에 얻은 추진력으로 미래의 과제를 추진하는 것.그것이 경제를 살리는 바른 길이다.

그래야 "한국경제는 대학입시에 떨어진 고등학생"이라는 중국인의 비아냥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