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임병수 "라이브 바는 삶의 일터이자 무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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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7집인가요?”
“아직도 7집입니다.”
1984년에 ‘약속’이라는 노래로 데뷔해 이제 23년차 가수라고 했다. 아쉽게도 그 23년 가운데 절반은 공백기였다. 그래서 12년 만에 나온 7집은 대중에게도, 가수에게도 참 각별한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다. 반가운 컴백의 주인공은 ‘이렇게 좋은데…’라는 음반과 함께 돌아온 가수 임병수(47) 씨다.
조촐하게 지인들 앞에서 컴백 공연을 했던 한남동의 한 레스토랑에서 모처럼만에 바쁜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는 임병수 씨를 만났다. 인터뷰 내내 레스토랑 안에는 그의 신곡들이 흘러 나왔다. 타이틀에는 사랑하는 이를 만나서 ‘이렇게 좋은데’라는 애절한 내용을 담았지만, 다시 무대에 가수로 서니 ‘이렇게 좋은데’라는 뜻으로도 들렸다.
데뷔한 다음 해인 1985년에 나온 2집 ‘사랑이란 말은 너무 너무 흔해’, 1986년 3집 ‘난 어지러워요’가 연이어 히트했다가 3, 4, 5년 간격으로 임병수라는 이름을 새긴 음반이 뜸해지기 시작했다. 1995년에 출시된 6집을 끝으로 그는 더 이상 음반을 내지 않았다. ‘아이스크림 주세요/ 사랑이 담겨 있는/ 두 개만 주세요/ 사랑을 전해 주는’이라는 가사의 ‘아이스크림 사랑’이나 ‘난 어지러워요 지금/ 나 좋아졌나봐/ 나 사랑하나봐/ 또 만나고 싶어’라는 ‘난 어지러워요’ 등 특유의 떨림이 특색이던 그의 노래도 조금씩 잊혀져 갔다.
“젊을 때는 이런저런 시도를 하면서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았지만 결혼 후 가족을 꾸리게 되니까 아무래도 전보다 조심하게 되더라고요.”
그는 1995년 결혼과 함께 연예 활동보다는 레스토랑에 이어 라이브 바를 운영하며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다해 왔다. 그가 운영하는 청담동의 라이브 바 ‘파티 스테이션’만이 가수 임병수를 기억하는 사람들을 반가이 맞아 주는 아지트와 같은 공간이 되어 주었다.
술보다 음악과 웃음이 있는 곳
“처음에 제가 라이브 카페를 한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는 아마 6개월 가기도 힘들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저도 그랬고요. 하지만 3년 넘게 한곳에서 꿋꿋이 버티고 있습니다. 술보다 음악과 웃음이 많은 곳이어서 가능한 일이었지요.”
파티 스테이션은 전체 테이블이 다섯 개밖에 안 되는 조그만 공간이다. 그나마 일행이 많은 손님이라도 오면 테이블을 합쳐서 손님을 받느라 두세 좌석만 차도 금세 만원이 된다. 규모가 작은 곳답게 인심이 넘쳐나는 것이 파티 스테이션의 장점이다.
“한 손님을 위해 오징어 한 마리를 구우면 냄새가 전부 퍼져나가니까 외면할 수가 있나요. 모든 테이블에 무료로 제공해야지요. 노래 잘하는 손님이 찾아와서 라이브를 하는 날에는 기분이 좋아서 안주를 돌리기도 하고요. 안주 접시가 빈 테이블이 눈에 들어오면 무한 리필을 합니다.”
너무 후해서 장사가 되려나 싶지만, 오히려 작아서 갖게 되는 장점도 있다. 큰 가게들보다 매출이 적은 만큼 들이는 비용도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비용 대비 수익을 따져보면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닌 셈이다.
“이익을 따져야 하는 사업이라는 사실을 느끼지 못하고 순탄하게 지나쳐 왔거든요. 스트레스도 덜 받게 되고 자연스럽게 좋은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나게 되더라고요.”
조그마한 공간에 알음알음 찾아든 손님들이 모여든 파티 스테이션에는 간판조차 없다. 지나가다 우연히 들른 손님은 한 명도 없는 가게, 파티 스테이션만의 분위기에 매료돼 드나드는 손님이 전부인 가게다.
“앞으로 한남동 쪽에 더 작은 규모로 가게를 옮길 계획입니다. 한남동 근처 이태원 쪽에는 남미에서 오신 분들도 많잖아요. 제가 좋아하는 남미 음악도 들려주며 누구든지 즐길 수 있는 소박한 커뮤니티로 끌어가고 싶어요.”
그에게 파티 스테이션은 일터이자 무대였다. 새벽 두세 시까지 가게를 지키며 라이브 무대에 매일처럼 서는 동안 노래에 대한 열정은 사그라지기는커녕 더욱 불타올랐다. 손님들 앞에서 기타와 노래를 선보이다가 한두 소절의 멜로디가 떠오르기도 했고 멜로디에 살을 붙여 몇 번씩 가다듬어 하나의 곡으로 완성해 나갔다.
“컴백하고 나서 12년이 지났는데도 목소리가 이전과 똑같아 참 신기하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어요. 방송에는 안 보였지만 저는 라이브 카페와 파티 스테이션에서 쉬지 않고 노래를 하고 있었습니다. 노래 실력이 변하지 않을 수밖에요.”
가끔씩은 KBS 텔레비전의 열린음악회나 7080콘서트 같은 프로그램에서 섭외가 들어와 1980년대 중반을 대표하는 가수로 얼굴을 내비치기도 했다. 그러나 남미 음악이나 옛 노래를 부르며 구색 맞추기로 한두 달에 한 번 서는 무대로는 성이 차지 않았다. 급기야 5년 전부터 음반을 준비하다가 3년을 망설이고 다시 2년을 준비해서 이번 7집을 내보내게 됐다.
“스스로 자신이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가수가 음반을 내야지 뭐하느냐며 격려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가요계가 불황이어서 힘들겠다는 말도 있어서 혼란스러웠어요. 마음을 비우고 제대로 된 음반을 내자고 결정했지요.”
이번 7집에서는 데뷔곡 ‘약속’ 리메이크와 ‘Quizas, Quizas, Quizas’ 외에는 전부 직접 작사와 작곡을 했다. 전체 열다섯 곡 중 여섯 곡은 스페인어로 가사를 썼다. 전곡에서 풍기는 정통 가요도 아니면서 남미 음악 같기도 한 독특한 느낌은 여전하다. 본인은 한국 가사로 된 곡에 더 신경을 썼는데도 주변 사람들은 스페인어로 된 노래를 더 로맨틱하게 받아들인다고 한다.
남미 쪽에 한국 노래 수출하고 싶어
“12년이나 시간이 지났고 나이 들어서 컴백하는데 트로트로 하면 어떻겠느냐는 유혹도 있었어요. 아니다, 임병수식 창법과 발라드 그대로 가자고 마음먹었습니다. 어설픈 변화보다 내가 잘할 수 있는 음악을 사람들에게 쉽게 전달하는 방법을 생각했습니다.”
컴백한 지 이제 한 달. 아직은 가수 임병수가 돌아와서 반갑고 좋다는 사람들 일색이다. 편한 마음으로 7집을 냈지만 괜스레 욕심도 나고 앞으로의 포부도 크다. 한국에서 반응이 좋으면 그 자신감을 발판으로 남미 쪽 레코드 회사들과 접촉할 계획이다. 볼리비아에서 고등학교 때까지 살았고 그 이후로도 남미 음악을 즐겨 들었던 그에게 남미는 한국 다음으로 친근한 장소다.
“노래를 들어본 사람들이 스페인어로 부를 때 제 음색이 더 부드럽다고 하네요. 젊은 후배 가수들이 아시아권에서 한류를 일으켰듯이 남미에도 한국 노래가 널리 알려졌으면 합니다.”
가수 임병수는 외모나 목소리가 20년 전 그대로인 채 돌아왔다. 힘든 일도 힘들게 받아들이지 않고 편안하게 살아와서 늙지 않는 것 같다며 웃는다. 덧붙여 대중은 냉정하고 인기는 사라진다는 사실을 알지만 교감할 수 있는 사람들과 자신을 위해 편한 마음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남들만큼의 고생도 했고 남부럽지 않은 인기도 누려 본 그이기에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음악으로 돌아왔다는 꾸밈없는 고백이 투명하게 빛난다.
김희연 객원기자 foolfox@naver.com
“아직도 7집입니다.”
1984년에 ‘약속’이라는 노래로 데뷔해 이제 23년차 가수라고 했다. 아쉽게도 그 23년 가운데 절반은 공백기였다. 그래서 12년 만에 나온 7집은 대중에게도, 가수에게도 참 각별한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다. 반가운 컴백의 주인공은 ‘이렇게 좋은데…’라는 음반과 함께 돌아온 가수 임병수(47) 씨다.
조촐하게 지인들 앞에서 컴백 공연을 했던 한남동의 한 레스토랑에서 모처럼만에 바쁜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는 임병수 씨를 만났다. 인터뷰 내내 레스토랑 안에는 그의 신곡들이 흘러 나왔다. 타이틀에는 사랑하는 이를 만나서 ‘이렇게 좋은데’라는 애절한 내용을 담았지만, 다시 무대에 가수로 서니 ‘이렇게 좋은데’라는 뜻으로도 들렸다.
데뷔한 다음 해인 1985년에 나온 2집 ‘사랑이란 말은 너무 너무 흔해’, 1986년 3집 ‘난 어지러워요’가 연이어 히트했다가 3, 4, 5년 간격으로 임병수라는 이름을 새긴 음반이 뜸해지기 시작했다. 1995년에 출시된 6집을 끝으로 그는 더 이상 음반을 내지 않았다. ‘아이스크림 주세요/ 사랑이 담겨 있는/ 두 개만 주세요/ 사랑을 전해 주는’이라는 가사의 ‘아이스크림 사랑’이나 ‘난 어지러워요 지금/ 나 좋아졌나봐/ 나 사랑하나봐/ 또 만나고 싶어’라는 ‘난 어지러워요’ 등 특유의 떨림이 특색이던 그의 노래도 조금씩 잊혀져 갔다.
“젊을 때는 이런저런 시도를 하면서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았지만 결혼 후 가족을 꾸리게 되니까 아무래도 전보다 조심하게 되더라고요.”
그는 1995년 결혼과 함께 연예 활동보다는 레스토랑에 이어 라이브 바를 운영하며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다해 왔다. 그가 운영하는 청담동의 라이브 바 ‘파티 스테이션’만이 가수 임병수를 기억하는 사람들을 반가이 맞아 주는 아지트와 같은 공간이 되어 주었다.
술보다 음악과 웃음이 있는 곳
“처음에 제가 라이브 카페를 한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는 아마 6개월 가기도 힘들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저도 그랬고요. 하지만 3년 넘게 한곳에서 꿋꿋이 버티고 있습니다. 술보다 음악과 웃음이 많은 곳이어서 가능한 일이었지요.”
파티 스테이션은 전체 테이블이 다섯 개밖에 안 되는 조그만 공간이다. 그나마 일행이 많은 손님이라도 오면 테이블을 합쳐서 손님을 받느라 두세 좌석만 차도 금세 만원이 된다. 규모가 작은 곳답게 인심이 넘쳐나는 것이 파티 스테이션의 장점이다.
“한 손님을 위해 오징어 한 마리를 구우면 냄새가 전부 퍼져나가니까 외면할 수가 있나요. 모든 테이블에 무료로 제공해야지요. 노래 잘하는 손님이 찾아와서 라이브를 하는 날에는 기분이 좋아서 안주를 돌리기도 하고요. 안주 접시가 빈 테이블이 눈에 들어오면 무한 리필을 합니다.”
너무 후해서 장사가 되려나 싶지만, 오히려 작아서 갖게 되는 장점도 있다. 큰 가게들보다 매출이 적은 만큼 들이는 비용도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비용 대비 수익을 따져보면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닌 셈이다.
“이익을 따져야 하는 사업이라는 사실을 느끼지 못하고 순탄하게 지나쳐 왔거든요. 스트레스도 덜 받게 되고 자연스럽게 좋은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나게 되더라고요.”
조그마한 공간에 알음알음 찾아든 손님들이 모여든 파티 스테이션에는 간판조차 없다. 지나가다 우연히 들른 손님은 한 명도 없는 가게, 파티 스테이션만의 분위기에 매료돼 드나드는 손님이 전부인 가게다.
“앞으로 한남동 쪽에 더 작은 규모로 가게를 옮길 계획입니다. 한남동 근처 이태원 쪽에는 남미에서 오신 분들도 많잖아요. 제가 좋아하는 남미 음악도 들려주며 누구든지 즐길 수 있는 소박한 커뮤니티로 끌어가고 싶어요.”
그에게 파티 스테이션은 일터이자 무대였다. 새벽 두세 시까지 가게를 지키며 라이브 무대에 매일처럼 서는 동안 노래에 대한 열정은 사그라지기는커녕 더욱 불타올랐다. 손님들 앞에서 기타와 노래를 선보이다가 한두 소절의 멜로디가 떠오르기도 했고 멜로디에 살을 붙여 몇 번씩 가다듬어 하나의 곡으로 완성해 나갔다.
“컴백하고 나서 12년이 지났는데도 목소리가 이전과 똑같아 참 신기하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어요. 방송에는 안 보였지만 저는 라이브 카페와 파티 스테이션에서 쉬지 않고 노래를 하고 있었습니다. 노래 실력이 변하지 않을 수밖에요.”
가끔씩은 KBS 텔레비전의 열린음악회나 7080콘서트 같은 프로그램에서 섭외가 들어와 1980년대 중반을 대표하는 가수로 얼굴을 내비치기도 했다. 그러나 남미 음악이나 옛 노래를 부르며 구색 맞추기로 한두 달에 한 번 서는 무대로는 성이 차지 않았다. 급기야 5년 전부터 음반을 준비하다가 3년을 망설이고 다시 2년을 준비해서 이번 7집을 내보내게 됐다.
“스스로 자신이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가수가 음반을 내야지 뭐하느냐며 격려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가요계가 불황이어서 힘들겠다는 말도 있어서 혼란스러웠어요. 마음을 비우고 제대로 된 음반을 내자고 결정했지요.”
이번 7집에서는 데뷔곡 ‘약속’ 리메이크와 ‘Quizas, Quizas, Quizas’ 외에는 전부 직접 작사와 작곡을 했다. 전체 열다섯 곡 중 여섯 곡은 스페인어로 가사를 썼다. 전곡에서 풍기는 정통 가요도 아니면서 남미 음악 같기도 한 독특한 느낌은 여전하다. 본인은 한국 가사로 된 곡에 더 신경을 썼는데도 주변 사람들은 스페인어로 된 노래를 더 로맨틱하게 받아들인다고 한다.
남미 쪽에 한국 노래 수출하고 싶어
“12년이나 시간이 지났고 나이 들어서 컴백하는데 트로트로 하면 어떻겠느냐는 유혹도 있었어요. 아니다, 임병수식 창법과 발라드 그대로 가자고 마음먹었습니다. 어설픈 변화보다 내가 잘할 수 있는 음악을 사람들에게 쉽게 전달하는 방법을 생각했습니다.”
컴백한 지 이제 한 달. 아직은 가수 임병수가 돌아와서 반갑고 좋다는 사람들 일색이다. 편한 마음으로 7집을 냈지만 괜스레 욕심도 나고 앞으로의 포부도 크다. 한국에서 반응이 좋으면 그 자신감을 발판으로 남미 쪽 레코드 회사들과 접촉할 계획이다. 볼리비아에서 고등학교 때까지 살았고 그 이후로도 남미 음악을 즐겨 들었던 그에게 남미는 한국 다음으로 친근한 장소다.
“노래를 들어본 사람들이 스페인어로 부를 때 제 음색이 더 부드럽다고 하네요. 젊은 후배 가수들이 아시아권에서 한류를 일으켰듯이 남미에도 한국 노래가 널리 알려졌으면 합니다.”
가수 임병수는 외모나 목소리가 20년 전 그대로인 채 돌아왔다. 힘든 일도 힘들게 받아들이지 않고 편안하게 살아와서 늙지 않는 것 같다며 웃는다. 덧붙여 대중은 냉정하고 인기는 사라진다는 사실을 알지만 교감할 수 있는 사람들과 자신을 위해 편한 마음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남들만큼의 고생도 했고 남부럽지 않은 인기도 누려 본 그이기에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음악으로 돌아왔다는 꾸밈없는 고백이 투명하게 빛난다.
김희연 객원기자 foolfox@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