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년 이맘 때면 서해의 지는 해를 바라보며 한 해를 정리하고 새해를 맞으려는 연인이나 가족 단위 관광객들 때문에 주변 식당은 물론 숙박업소까지 초만원을 이뤄 진짜 장사할 맛 났는데…."

기름유출 사고 20여일째인 지난 28일 충남 태안 앞바다 만리포해수욕장에서 만난 어부김씨횟집의 정상명 사장(47)은 말 끝을 흐렸다.

올 연말엔 '송년인파' 대신 기름때가 잔뜩 묻은 방제복을 입은 자원봉사자들 외에 찾아오는 관광객이 없어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자원봉사자들 덕분에 파도와 함께 해안가로 몰려오던 시커먼 기름덩어리는 사라졌고 모래사장도 눈에 띄게 깨끗해졌지만 유마(油魔)는 끈질지게 지역주민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제자리 걸음인 보상문제는 만신창이가 된 주민들의 가슴에 깊은 상처 하나를 더 새겨놓았다.

만리포해수욕장까지 가는 길에는 '자원봉사자 여러분 감사합니다'에서부터 '정부는 피해보상을 일괄 처리하라'까지 각종 문구가 적힌 현수막이 겨울바람에 나부끼었다.

송년을 기념하기 위한 연인과 가족 단위 관광객들이 줄지어 기념촬영했다는 '만리포사랑노래비'만 쓸쓸하게 해수욕장을 지키고 서 있었다. "이제 다 복구됐어요. 괜찮으니 놀러와도 괜찮다고 써주쇼"라는 주변 상인들의 목소리엔 기름유출 때보다 더 심한 위기감이 배어 있었다. 만리포 인근 횟집 상당수는 문을 걸어잠갔고 그나마 문을 연 횟집들도 '해수를 외부에서 공수한다'며 안전을 강조한다.

방제 자원봉사자 10여명이 식사를 하고 있던 어부김씨횟집의 정 사장은 "언제까지 자원봉사자들이 남아 도와줄지도 모르고 과연 지역주민만 남았을 때 어떻게 살아갈지 막막하다"며 "중·고등학생인 애들은 커가는데 생활비 벌 데도 없고,정부는 별다른 대책을 내놓지 않아 걱정스럽기만 하다"고 말했다.어민들의 시름은 더 깊었다.

어민 김창옥씨는 "눈에 보이는 기름은 대부분 걷어냈지만 그렇다고 당장 고기잡이에 나설 수 있는 게 아니다"며 "앞으로 뭘로 벌어 먹고 살지 막막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보상문제도 주민들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었다.

태안 주변 마을마다 주민총회와 비상대책위가 결성돼 보상대책을 논의 중이지만 뾰족한 해결책은 없었다.몇몇 주민들은 "피해는 너무 광범위한데 보상규정은 복잡하고 보험사는 명확한 증빙자료를 요구하고 있어 과연 보상받을 수 있을지도 걱정"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구본춘 모항 어촌계장은 "증거확보는 어민들의 생계와 직결되는 문제지만 각종 증거확보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특히 소득증명이 어려운 '맨손어업인'들은 맨손어업 허가라는 게 있는지 이번에 처음 알았다며 발을 동동 구르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자원봉사자들도 단순한 방제작업만으론 태안 경제를 원상회복시킬 수 없다는 점을 안타까워했다. 기름제거 작업에 네 번이나 참여했다는 오희철씨(73)는 "방제작업만도 3년은 걸릴텐데 그때까지 주민들이 어떻게 살아가겠느냐"면서 혀를 찼다.

태안=김동욱 기자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