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문벌의 융성함으로는 광주(廣州) 이씨가 으뜸이다(黨今門閥之盛 廣州李氏爲最)."

조선 전기의 명신이자 학자였던 성현(1439~1504년)은 '용재총화'에 이렇게 기록했다.

광주 이씨는 조선에서 문과 급제자 188명,영의정ㆍ좌의정ㆍ우의정 5명,대제학 2명,청백리 5명,공신 11명을 배출한 가문.15세기말쯤 경북 칠곡으로 이주한 영남의 광주 이씨는 숙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문익공 이원정(1622~1680년)과 아들 이담명(1646~1701년) 등 조선 후기 남인을 대표하는 명문가로 번성했다.


지난해 12월28일부터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기증유물특별전 '광주 이씨 옛 종가를 찾아서'는 칠곡 석전마을의 문익공 종가 유품을 통해 옛 명문가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자리다.

문익공 종가에서 2002~2003년 기증한 2500여점의 유물 가운데 전적과 고문서 등 100여점을 통해 나라 역사의 기록,남인 사대부,칠곡 대가댁의 살림살이,사대부의 일상 등을 보여준다.

전시유물로는 이원정의 유품인 옥로(갓 장식)와 옥관자,갓끈을 비롯해 이원정의 아버지(이도장)로부터 이담명에 이르는 3대가 왕에게 받은 교지(관직 임명장) 300여장,승정원과 춘추관 사관으로 일했던 이담명이 기록한 '승정원사초' 161책 등이 눈에 띈다.

이 중 실록편찬의 기초 사료인 '승정원사초' 161책은 이담명이 현종 13년~숙종 원년까지 기록한 것.실물로는 처음 공개되는 최대 규모의 희귀 사초다.

숙종 16년(1690년) 영남 대흉년에 경상도관찰사로 나가 공을 세운 이담명이 임금에게 받은 교서도 눈에 띈다.

길이가 6m에 이르는 이 교서에는 잦은 가뭄으로 시달리던 경상도 백성들을 잘 다스리라는 임금의 당부가 담겨 있다.

또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선조ㆍ광해군 때의 명신 한음 이덕형(1561~1613년)의 초상화와 미공개 친필 초서 칠언시,이세원이 붕당 때문에 목숨을 잃은 조부 이원정의 억울함을 임금에게 호소했던 사실을 기록한 '천감록' 등도 전시되고 있다.

이 밖에도 157명의 노비 명단이 나오는 준호구(準戶口ㆍ호적등본),이도장ㆍ이원정ㆍ이담명의 문집 간행을 위해 제작한 목판 500여장,노비가 주인을 위해 관청에 제출한 소지(所志ㆍ민원),상속ㆍ증여문서 등 종가의 살림을 보여주는 다양한 유물도 만나볼 수 있다.

2월24일까지.

(02)724-0156

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