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택공사가 주민들이 민간 업체가 주도하는 개발 방식으로 추진해왔던 재개발 사업에 뒤늦게 시행권을 따내기 위해 잇따라 끼어들어 주민 및 건설업체와 마찰을 빚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특히 주공은 재개발 사업이 이미 초기 단계를 훨씬 지나 해당 지방자치단체가 조합 추진위원회를 승인한 곳까지 개입해 주민 동의를 따로 받고 있어 우월적인 지위를 이용해 사실상 민간 사업을 넘보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업계에서는 앞으로 재개발·재건축 사업이 활성화되면 주공이 개발이익 환수를 명분으로 한 공영개발을 앞세워 민간 업체와 충돌하는 일이 더 많아질 것이라며 차제에 주공의 역할을 재정립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다.

이와 관련,국민고충처리위원회가 오는 23일 건설회관에서 건설교통부 관계자 등이 참석한 가운데 '공기업이 참여하는 재건축·재개발 사업에서 사업시행자 및 시공자 선정 제도개선' 토론회를 열 예정이어서 교통정리가 주목된다.

◆주공 개입으로 잇따라 '마찰'

업계에 따르면 재개발을 추진 중인 안양 임곡3지구는 이미 작년 6월 50.7%의 주민 동의를 얻어 안양시로부터 조합추진위 승인까지 받았지만 주공이 공영개발을 선호하는 주민들로 뒤늦게 대표회의를 따로 구성해 별도로 주민 동의를 받고 있다.

이에 따라 주민들이 두 패로 갈리면서 조합 설립에 필요한 75%의 동의율을 확보하기가 어려워져 추진위는 최근 고충처리위원회에 주공 참여를 제한해 달라고 요청했다.

하남시 덕풍10 재개발구역에서도 조합추진위원회가 주공 참여를 거부하며 감사원에 '국민감사청구'를 요청한 상태다.이곳 추진위 관계자는 "주공이 시행자로 지정받기 위해 일당 15만~20만원짜리 도우미를 고용해 반대하는 주민 등을 중심으로 동의를 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외에 △서울 노량진 3-3구역 △노량진 6구역 △성남 금광1구역 등의 재개발 사업장에서도 주공이 시장조사 명목으로 현장에 사무실을 개설,공영개발을 추진하고 나서 갈등의 불씨를 안고 있다.

재개발 사업 수주를 추진하고 있는 건설업계의 불만도 높다.김의열 한국주택협회 팀장은 "주공이 개입하면서 주민들이 원하는 시공사가 사업에서 배제되는 일이 잇따르고 있다"고 전했다.

◆"주공에 유리한 법규 개정해야"

일선 재개발 지역의 주민들과 건설업계는 주공에 절대적으로 유리하게 돼 있는 현행 관련 규정을 개정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지금 규정상으로는 해당 지역 주민들이 추진위나 조합을 구성한 곳이라도 주공이 뒤늦게 뛰어들어 먼저 필요한 동의율만 확보하면 얼마든지 사업권을 딸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민간 재개발 방식은 75% 이상의 주민 동의를 얻어야 조합 설립과 시공사 선정이 가능한 반면 주공은 3분의 2,특히 뉴타운(재정비촉진지구)에서는 50% 이상의 동의를 받으면 시행자가 될 수 있다.

장성수 주택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민간사업의 조정자이자 중재자 역할을 해야 할 주공이 민간 업체와 구별되지 않는 제3의 '플레이어'로 활동하는 것은 공기업 위상에 맞지 않는 행위"라고 지적했다.

노동성 고충처리위원회 연구원은 "주공이 이미 추진위원회를 설립한 재개발 사업장에서까지 시행자가 되기 위해 별도의 주민 동의를 받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게 고충위의 입장"이라며 "건교부와 관련 규정 개정 작업을 협의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업계에서는 제도적인 개선책도 주문하고 있다.예컨대 주공이 시행자가 되더라도 시공사를 선정할 때는 주민들이 선호하는 민간 업체를 자유롭게 뽑게 하는 '공공·민간 공동시행 방식'을 대안의 하나로 제시하고 있다.이렇게 하면 주공의 사업 참여를 허용하는 동시에 이를 통해 주민 입장에서는 동의율과 인·허가 등의 절차를 빨리 진행할 수 있고 민간 업체도 시공권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정선 기자 sun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