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해운 영업맨'이었던 A씨가 '사업가'로 변신한 건 지난해 초였다.석탄 철광석 등 원자재를 운반하는 벌크선 운임이 치솟기 시작하자 더 늦기 전에 '선주가 되겠다'는 오랜 꿈을 실행에 옮긴 것.

은행 차입을 통해 1만6000t짜리 중고 벌크선 한 척을 1230만달러에 사들인 A씨는 요즘 대형 해운업체에 이 배를 빌려주며 하루 1000만원에 달하는 용선료(배 임대료)를 챙기고 있다.A씨는 "배를 구입해 선사를 차리려는 사람들이 늘면서 안전한 곳(대형 선사)에 용선하는 조건으로 배 값의 80%까지 대출해주는 은행이 생겨날 정도"라고 말했다.


사상 유례없는 '벌크 호황'에 힘입어 새로 해운업에 뛰어드는 '새내기 선사'들이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벌크 운임이 강세인 요즘이 '해운회사 창업의 꿈'을 이루기에 적기란 판단에서다.

작년 12월 초까지 10,000포인트대를 기록했던 벌크선 운임지수(BDI·Baltic Dry Index)는 중국의 긴축 정책 여파로 지난 14일 7654포인트까지 하락했지만,업계에서는 '원자재 블랙홀'인 중국 수요가 그다지 줄어들지 않을 전망인 반면 주요 선사들의 벌크선 확충 계획이 지연되고 있는 점을 들어 올해도 강세를 띨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15일 한국선주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말 현재 협회에 등록된 선사는 모두 129개사로,1년 만에 37개나 늘었다.2005년 말 회원사 수가 64개였던 점을 감안하면 2년 만에 회원사 수가 2배 이상으로 불어난 셈이다.회원으로 가입하지 않은 업체를 합치면 작년까지 선사 수는 총 250여개에 달할 것으로 해운업계는 추정하고 있다.

선주협회 관계자는 "한국 해운 60년 역사상 이처럼 단기간에 선사가 늘어나기는 처음"이라며 "올해도 BDI지수가 7000~8000포인트 수준의 강세가 예상되는 만큼 '선사 설립 러시'는 계속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해운업에 뛰어든 신예들은 대개 벌크선 1~2척을 보유한 군소업체라는 게 공통된 특징이다.벌크 부문은 중국의 긴축정책과 미국발(發) 경제침체 우려에도 불구하고 호황이 예상되는 데다 컨테이너 부문에 비해 '진입장벽'이 낮기 때문이다.

더구나 벌크 부문은 선박 가격이 상대적으로 저렴한 데다 영업 및 관리도 용이해 군소업체가 파고들기 쉽다.

하지만 이들 신규 선사 가운데 화물을 실어나르는 '해운 본연의 업무'에 충실한 업체는 손에 꼽을 정도다.대부분은 자신의 배를 대형 선사에 빌려주고 용선료만 챙기거나,매입가보다 비싸게 선박을 되파는 데만 골몰하고 있다는 게 업계의 분석이다.엄밀한 의미에서 최근 2년 동안 새로 생긴 선사의 상당수는 '허수'라는 얘기다.

해운브로커에서 최근 선주로 변신한 B씨는 "시세 차익을 노리고 최근 23년된 2만6000t짜리 벌크선을 샀다"며 "중고선 1,2척을 도입한 동료들도 벌크선 가격이 더 오르기 전에 사들인 뒤 최대한 차익을 남기고 되파는 걸 목표로 삼고 있다"고 말했다.

벌크선 가격 급등 여파로 해운업계에 '선박 투기 바람'이 불고 있다는 설명이다.실제 한국해양수산개발원에 따르면 2006년 6800만달러 수준이던 케이프 사이즈(17만 DWT)급 벌크선 가격은 작년 말 1억달러로 1년 만에 50%가량 상승했다.

선주협회 관계자는 "벌크 호황이 어느 순간 사그라들 경우 배 값의 대부분을 대출로 구입한 선사는 큰 타격을 받을 것"이라며 "1980년대에도 해운업이 불황에 빠지면서 무더기 도산 및 통폐합 바람이 분 적이 있다"고 경고했다.

김미희 기자 iciic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