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우(李賢雨) < 서강대 교수·정치외교학 >

미국에서 전국적으로 여성이 투표권을 갖게 된 것은 1920년이다.남북전쟁이 끝난 후 연방헌법은 흑인의 투표권을 인정했지만 1960년대 중반까지도 일부 남부 주에서는 흑인들이 투표를 자유롭게 할 수 없었다.이처럼 백인남성에 비해 한참 후에야 참정권을 인정받은 여성과 흑인이 올 11월 미국대선의 민주당 후보로서 가장 강력하게 부각되고 있다.

여성이 미국대선에 출마한 첫 사례는 1872년 빅토리아 우드헐이라는 재벌여성이 소수당인 평등당의 후보가 된 것이다.역사상 예비선거에서 여성후보가 가장 많은 득표를 한 것은 1972년 민주당의 셜리 치스홈이 전체 민주당 투표의 2.7%를 얻은 것이었다.흑인의 경우는 제시 잭슨이 1988년 민주당 후보로서 29.1%를 득표한 것이 가장 높은 득표율을 보인 것이다.그러나 소수자로서 이들의 예비선거 승리 가능성은 매우 낮았기 때문에 소수자의 출마라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했다.

이번 민주당 예비선거에서 선두주자 2명이 모두 정치주류인 백인남성이 아니라는 점이 관심사다.더욱이 공화당의 유망후보들이 모두 백인남성이라는 점과 대비해 더욱 이야깃거리가 되고 있다.그런데 한 가지 짚어야 할 것이 힐러리와 오바마가 소수자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가다.두 사람은 각각 예일대와 하버드 법대를 졸업한 최고의 엘리트들이며 소수자로서 어떤 불이익도 받지 않았다.이들의 경력은 앞에서 말한 치스홈이나 제시 잭슨처럼 뚜렷한 집단 정체감을 갖고 있지 않다.힐러리와 오바마 두 사람이 자신이 소수집단(minority group)의 이익을 강하게 옹호하지 않는다면 이들이 어떤 집단 출신인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관심은 어떤 면에서 이들이 미국유권자들의 지지를 얻고 있는지에 맞춰져야 한다.

이번 미국대선의 가장 큰 화두는 '변화'다.부시행정부와 워싱턴 정치에 대한 미국인의 반감이 높고 새로운 정치에 대한 요구가 늘어나고 있다.지난 11일 갤럽조사를 보면 미국정치에 불만이라는 응답자가 73%에 이르며,만족하는 응답자는 24%이다.특히 민주당 지지자들 가운데서는 단 9%만이 정치에 만족하고 있다.이러한 상황을 정확히 인식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데 성공한 것이 오바마와 힐러리이다.

오바마는 초선상원으로서 신선함을 무기로 정치변화를 약속하면서 유권자들을 모으고 있다.힐러리는 대통령 부인,재선 상원의원으로서 풍부한 정치경험과 변화를 동시에 이룰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결국 이들 두 후보는 새로운 무엇을 원하는 유권자들의 요구에 흑인과 여성이라는 외적 조건이 나쁘지 않게 작용했으며,특히 소수자들 중에서도 미국사회 내의 성공한 주류에 속한다는 사실이 긍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인들이 원하는 대통령은 워싱턴의 변화를 가져오고,성공한 경력을 지닌 사람이어야 한다.미국인들은 로비스트처럼 비밀정치에 익숙하거나 70세가 넘은 노회한 정치인은 대통령이 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바람직한 대통령의 이미지가 성공과 긍정을 의미한다면,피해야 할 대통령은 권위와 부패를 나타낸다.또한 대통령이 솔직해야 하고 리더십과 능력을 갖추고 있으며,사회를 통합할 수 있는 자질이 있어야 한다는 기대도 있다.

미국 예비선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사회적 평가가 애초부터 개인에게 주어진 귀속요인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성취한 업적요인이 중요하다는 사실이다.흑인들의 단기적 이익을 주장하기보다는 쓴소리를 통해 흑인의 장래를 제시하는 오바마,여성에 치중하지 않고 민주당의 이념에 충실한 힐러리를 보면서 미국인은 이들이 자신이 속한 소수자집단의 지도자로 보지 않는다.시대정신을 읽어낼 수 있는 후보,긍정적 미래를 제시할 수 있는 후보,그리고 통합을 이룰 수 있는 대통령을 찾으려는 것이 이번 미국대선의 커다란 흐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