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투자공사(KIC)가 메릴린치에 20억달러 투자 결정을 내리기에 앞서 씨티그룹 등 미국의 다른 투자은행에 투자하는 방안도 다각도로 검토했던 것으로 확인됐다.KIC는 그러나 메릴린치의 리스크가 상대적으로 적다고 판단,메릴린치에만 투자하기로 최종 결정했다.

KIC 고위 관계자는 "씨티 등 다른 금융회사 투자도 검토했지만 씨티는 규모가 너무 큰데다 리테일 쪽이 많아 미국 경기가 나빠지면 부실이 급속히 커질 것으로 판단해 투자 대상에서 제외했고,소규모 금융회사는 '한국 국부펀드의 첫 전략적 투자'라는 상징성에 맞지 않아 대상에서 배제했다"고 16일 말했다.

이 관계자는 "메릴린치의 경우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문을 제외한 사업 각 부문의 영업기반이 튼튼하고 영업력이 호조를 보이고 있다"며 "부실자산의 상각 이후 빠른 수익력 회복이 기대돼 투자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메릴린치 본사의 최고재무책임자(CFO)가 '넬슨 최'라는 한국계 미국인이란 점도 이번 투자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전해졌다.KIC는 넬슨 최를 통해 메릴린치에 투자의향을 전달했고 메릴린치가 KIC에 투자를 공식 요청한 것.월가 투자은행 입장에선 그동안 전략적 투자를 하지 않은 KIC에 먼저 투자 요청을 할 수가 없었고,KIC도 평판을 감안해 섣불리 투자를 제안할 수 없었던 조심스런 상황에서 한국계 미국인이 결정적인 통로 역할을 한 셈이다.

한편 KIC가 이번에 메릴린치에 투자한 20억달러 규모의 의무전환우선주는 향후 1년간 매각이 금지된 것으로 확인됐다.당초 KIC는 보도자료에서 이번 의무전환우선주는 2년9개월 뒤부터 보통주로 전환된다고만 발표했다.하지만 실제로는 투자 시점으로부터 1년 동안 '로크업(Lock-up.매각제한)' 조건이 걸려있어 의무전환우선주를 인수한 시점부터 1년간은 주식을 팔 수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KIC 입장에선 그만큼 투자금이 묶이는 유동성 리스크를 안고 있는 셈이다.

물론 1년이 지나면 KIC가 주식을 팔 수 있다.하지만 이 때는 의무전환우선주를 일단 보통주로 전환해야하는데 이렇게 되면 연 9%의 고배당은 포기해야 한다.또 전환가격도 당초 알려진 수준(52.4달러 정도)보다 높아질 수 있다.

KIC 측은 그러나 "우리는 단기투자자가 아닌 장기투자자"라며 "미국 경기가 좋아지고 서브프라임 관련 부실 규모가 줄어들면 메릴린치 주가가 올라 이익을 낼 수 있다"고 밝혔다.

또 "메릴린치의 보통주 배당은 보통 시가의 2.5% 수준이지만 이번 의무전환우선주는 연 9% 수준"이라며 "투자 조건이 좋은 편"이라고 덧붙였다.

주용석 기자 hoho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