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산 < 소설가 >

삼국시대 말기,백제 의자왕의 침략에 시달리던 신라가 자구책으로 동맹을 꾀하면서 가장 먼저 선택한 나라는 고구려였다. 조정의 결정에 따라 당시 신라 사신 김춘추는 국경을 넘어 고구려 땅으로 들어갔다. 실권자인 연개소문을 만나 동맹을 제안하고 원군을 요청했다. 그러나 연개소문은 해묵은 과거지사를 들춰내 신라가 오래 전에 차지한 죽령 이북 땅을 모두 돌려달라고 억지를 부렸다. 김춘추가 난색을 보이자 고구려 조정은 외교상의 통례와 상규를 뒤엎고 사신으로 온 김춘추 일행을 감금한 뒤 아예 죽이겠다는 협박마저 서슴지 않았다.

이로써 고구려를 향한 신라의 동맹 제안은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었다. 보다 못한 고구려 신하 '선도해'란 이가 '별주부전'의 내용을 넌지시 귀띔해 준 덕택에 김춘추는 가까스로 화를 모면하고 생환할 수 있었다. 고구려와 동맹에 실패한 신라는 차선책으로 당나라를 선택한다. 나당 연합이 맺어진 이면에는 그런 비화가 있었다고 삼국사기는 전한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안타깝게 여기는 고구려 멸망은 연개소문의 쇄국정책과 철권통치에서 비롯되었다. 연개소문은 '정관의 치세'를 열며 한창 세력을 떨치던 당태종 이세민을 상대로 백전불패의 신화를 창조한 위대한 인물임에 틀림없지만, 전쟁 이전에 선행되어야 할 교류와 선린엔 왜 그토록 폐쇄적으로만 일관했는지 의문이 남는다. 안으로 불패의 군사를 기르고 밖으로 주변국과 교류를 강화했다면 그 뒤의 역사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연개소문이 죽고 불과 2년 만에 고구려는 망한다. 그런 점에서 '천시(天時)와 지리(地利)는 인화(人和)에 미치지 못한다'는 맹자의 경구는 항상 새겨둘 만한 진리다. 한마디로 고구려 멸망은 외교의 실패에서 왔고, 신라는 외교의 성공으로 삼국통일이란 대업을 달성할 수 있었다.

역사는 돌고 돈다. 옛날 당나라를 현재 미국이나 국제사회로 치환해놓고 보면 지금의 북한 정권은 여러 면에서 연개소문 정권과 신기할 만큼 닮았다. 핵무기와 군비 투자에 운명을 걸고, 폐쇄정책과 철권통치로 일관하는 것은 물론, 하다못해 실권자가 장막 뒤에 숨은 것까지 혀를 내두를 정도로 흡사하다. 거기 비하면 우리 남한은 건국 이후 신라의 행보를 따라온 셈이다. 지리적으로 북한은 대륙의 일부요, 남한은 삼면이 바다에 둘러싸인 반도 국가인데, 대륙과 연결된 북쪽에 적과 대치한 군사분계선이 있으니 실상은 일본보다도 더 불리한 섬나라라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니다. 이런 형세에서 우리가 취할 선택은 예나 지금이나 활발한 교류밖에 없다. 천년 전에도 그러했듯이 지금도, 앞으로 천년 뒤에도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운명적으로 그 길을 걸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외교의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신라사람들이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외교를 통해 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가 불황을 타개하고 세계 일류국가로 재도약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외교에 중점을 둬야 한다. 북한과의 관계도 혈연보다는 철저한 외교적 관점에서 접근하고 상대해야 장기적으로 상생(相生)의 바람직한 결과를 얻을 거라고 본다. 우리와 비슷한 처지에 놓인 다른 나라의 외교에서도 배울 점이 적지 않다. 늦게라도 남의 좋은 점을 본받고 배우는 것은 허물이 아니다.

다행히 다음 정부를 맡을 차기 집권층에서 주변 4국에 특사를 파견해 외교 전반의 일신(一新)을 도모하기로 했다니 반갑다. 현대는 외교전(外交戰)이다. 오죽하면 외교를 전쟁에 비유했으랴. 그러나 전쟁과는 달리 외교는 매일 할 수 있고, 날마다 새로운 성과를 낼 수도 있다. 화려한 수사 뒤의 속 빈 강정 대신 반드시 실익과 실리를 추구하는 지혜롭고 영리한 외교가 되었으면 한다. 꼬인 일은 풀고 서운한 점은 다독여서 우리 외교의 활발한 성과가 다음 정부에선 반드시 국운융성으로 이어지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