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의 가격은 때로 마시는 이를 현혹시킨다. '1만원짜리 와인이 얼마나 맛있겠어''100만원짜리 와인은 뭐가 달라도 달라'는 식의 선입견을 갖게 만든다. 평론가들도 대체로 비싼 와인에 후한 점수를 주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비쌀수록 맛있다'는 공식은 종종 깨지곤 했다.

1976년 파리 인터컨티넨털 호텔에서 열린 '파리의 심판'이 대표적이다. 당시 '샤토 무통 로쉴드''샤토 오브리옹' 등 한 병에 수백만원씩하는 프랑스 특급 와인들과 미국 캘리포니아의 '신인급' 와인 간의 블라인드 테이스팅(라벨,빈티지 등을 가리고 시음하는 방법)이 진행됐는데 '리지 빈야드 몬테 벨로 1971'라는 미국 와인이 1위를 차지했다.

2004년에도 비슷한 '사건'이 일어났다. 영국의 저명 와인 잡지인 '디캔터' 주관으로 열린 '프리미엄급 와인 블라인드 테이스팅'에서 '세냐''비냐도 체트윅' 등 칠레 에라주리즈사의 와인들이 1,2위를 싹쓸이한 것. 이 대회는 디캔터 편집장을 비롯해 세계 각국의 와인 평론가 및 관계자들이 모여 프랑스,이탈리아,칠레를 대표하는 총 16개 명품 와인들을 블라인드 테이스팅한 행사. 올 7월엔 서울에서 열릴 예정이다.

'파리의 심판'으로 미국 캘리포니아 와인이 세계적인 와인의 반열에 올랐듯이 2004년 테이스팅은 칠레도 고품질의 와인을 만들 수 있음을 전 세계에 알렸다. 당시 '세냐' 등 칠레 와인과 경합을 벌인 와인은 프랑스의 '샤토 라피트''샤토 마고''샤토 라투르',이탈리아의 '티냐넬로''사시카이아''솔라이아''구아도 알 타쏘' 등 이미 와인 평단으로부터 최고로 평가받던 와인들이었다.

'세냐'는 미국 캘리포니아 와인의 선구자인 로버트 몬다비가 에라주리즈사와 1995년 합작해 만든 와인이다. 스페인어로 '특이한 흔적' 혹은 특정인의 사인(signature)을 의미하며 칠레에서 첫 번째로 생산된 '럭셔리 와인'으로 평가받는다. 스파이시하고 잘익은 베리 과일의 맛과 부드럽고 긴 타닌의 맛이 균형을 이루는 와인으로 카베르네 소비뇽과 카르미네르를 블렌딩했다. 가격은 15만원.

1870년부터 칠레에서 와인을 생산해 온 에라주리즈 가문의 가장 큰 특징은 바이오다이나믹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는 점이다. 화학비료,제초제,살충제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를 유기농 와인이라 부른다)은 물론 퇴비 등 비료도 극소량만 뿌린다. 해충을 잡을 때는 무당벌레와 같은 천적을 이용한다. 산업화 이전 농민들의 수확방식을 고스란히 따르고 있다는 얘기다.


박동휘 기자 donghui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