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은 의식 또는 무의식의 심부(深部)로부터 길어 올리는 '추억의 두레박'인 것 같아요.

화려하든 어둡고 우울하든 간에 그곳에는 자기애와 인간에 대한 연민의 감정이 뒤섞여 있거든요."

서울 사간동 갤러리 현대에서 23일부터 내달 13일까지 회고전을 갖는 서양화가 황주리씨(51)는 "넓은 세상을 둘러보고 온 이방인처럼 따끈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고 싶다"며 "그림은 세상을 바라보는 창인 만큼 더 이상 감시와 관찰이 아니라 연륜의 깊이가 담긴 평화로운 시선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화력(畵歷) 30년째인 황씨의 이번 전시 테마는 '황주리 1980~2008,그리고 삶은 계속된다'.1980년 모노톤의 흑백 그림 '자화상'을 비롯해 '추억제''내가 살려면''돌에 관한 명상''맨해튼 블루스''여행에 관한 명상' 등 100여점이 출품된다.

황씨의 그림은 갖가지 기억들과 빛나는 유머,낯선 상상력으로 채워진 엽서같다.

평범한 일상을 흑백이나 컬러로 포착하고 이를 만화경처럼 되비춘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시선'에 대해 묻고 대답한다.

그의 작품에 자주 '눈'의 이미지 등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사랑과 증오,너그러움과 편협함,대범함과 소심함 등 인간의 감정이나 성격은 동전의 양면처럼 상황에 따라 모습을 바꿉니다.

시시각각으로 달라지는 감정은 긍정 혹은 개방성(원색)과 부정 혹은 폐쇄성(흑백)의 형태로 자리를 잡지요."

출판사를 경영하던 아버지와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한 책벌레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그림을 이야기 형태로 꾸민다.

초기 화면이 원고지 형태의 사각 틀을 기본 구도로 했다면 최근에는 살아 움직이는 식물로 바뀌었다.

"일상의 풍경이 가득한 '식물학' 시리즈 등 원색 그림들은 제가 대여섯 살 때부터 그려온 익숙한 것입니다.

가족,국가,세계,우주가 그림 속에서 팽창되어 가는 '인연의 탯줄'을 꿈꾼 것이죠."

이화여대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1987년 뉴욕으로 건너간 황씨는 도시문명의 중심에서 느낀 감정을 모노톤으로 풀어낸 '맨해턴 블루스'시리즈를 발표하면서 주목받았다.

이번 개인전을 기념해 지난 4년간 틈틈이 써 온 산문집 '땅을 밟고 하는 사랑은 언제나 흙이 묻었다'(생각의나무)와 화집도 함께 출간했다.

(02)2287-3563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