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 버냉키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의 처지가 딱하다.

기준금리를 0.75%나 끌어내렸지만 시장 반응이 신통치 않다.

오히려 대응이 늦었다는 둥,카리스마가 없다는 둥 온갖 험담이 나돈다.

앞서 금리인하 계획을 밝혔을 때도 주가 급락세는 멈추지 않았다.

말 한마디만 해도 시장이 민감하게 움직였던 앨런 그린스펀 전 의장 시절과는 대조적이다.

인플레 억제를 최우선 과제로 내걸었다가 금리인하 쪽으로 방향을 틀었음에도 이러하니 명예는 없고 무거운 책임과 비난만 쏟아지는 꼴이다.

버냉키의장이 욕을 먹는 게 합당한지는 의문이다.

미국경제 악화의 도화선이 된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은 과도한 부동산가격 상승에 원인이 있고,이는 장기간 유지된 저금리정책과 그에 따른 투기 붐에 기인한 것이다.

근본적 책임은 그린스펀에 있다고 봐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는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씨티 메릴린치를 비롯한 세계적 금융회사들이 아시아 국부펀드 등에서 수혈을 받는 처지에 빠졌고 제조업과 소비부문으로도 파장이 확산돼 나가고 있다.

아시아 유럽 등 글로벌 증시도 불안하기 짝이 없어 전세계적으로 심각한 자산 디플레가 초래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높아간다.

자산 거품이 한꺼번에 빠질 경우 그 부작용은 엄청나다.

이는 일본의 사례를 살펴보면 쉽게 드러난다.

1980년대 말 천정부지로 치솟았던 부동산과 주식 가격이 거품 붕괴와 함께 불과 몇 년 사이 반토막 이하로 추락했다.

그 여파로 금융회사들은 은행 증권 보험 등 업종을 불문하고 파산 사태가 속출했고 서민들은 집값을 훨씬 웃도는 주택융자금을 갚느라 허리가 휘어졌다.

금융산업의 업계구도가 지금처럼 굳어진 것도 당시 구조조정과 합병 회오리가 몰아쳤던 결과다.

욱일승천의 기세로 내달리던 일본경제 또한 '잃어버린 10년'으로 불리는 장기불황의 늪에서 허우적댔다.

최근 미국경제 상황은 부동산가격과 주가가 급락하고 금융 부실이 커지고 있다는 점에서 일본의 버블 붕괴 초기 모습과 유사하다.

아직 드러나지 않은 피해액도 막대하다고 하니 버블 붕괴 및 경기침체 과정이 한층 심화될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한다.

하지만 다행스런 것은 미국은 일본의 경우와는 달리 외국자본 유입이 비교적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는 점이다.

중동 아시아 자본 등이 금융회사 주식을 사들이는 등 위기 극복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또 혹시라도 세계경제 주도권을 뺏기지나 않을지 초조해하며 일본경제의 번성을 견제하던 세력(미국)이 있었던 것과는 달리 그런 견제세력도 없다.

오히려 모든 국가가 미국경제 침체로 세계경제 전체가 수렁에 빠지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게 현실이다.

6%라는 의욕적 성장률을 올해 목표로 잡은 우리나라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 점에서 미국은 일본의 경우보다는 여건이 낫다.

정책을 잘 운용하고 국제적 공조체제를 이끌어낼 수 있다면 일본 같은 심각한 자산디플레는 겪지 않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버냉키 의장이 이런 점들을 잘 활용하며 리더십을 발휘해 위기에 처한 미국경제와 세계경제를 구해낼 수 있을지,그리하여 그린스펀의 현역 시절 못지않은 위상과 신망을 확보할 수 있을지 주목거리다.

이봉구 논설위원 bk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