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달러 환율이 달러당 900원 근방까지 떨어졌던 작년 10월 하순.중견 수출업체 A사에 은행 외환담당 직원들이 찾아왔다.

이들은 "환율이 더 떨어질테니 빨리 선물환을 팔라"고 권유했다.

일부 은행은 환율이 조만간 800원대 중반까지 하락할 것이라고도 했다.

환율이 떨어지면 수출업체는 원화 환산 수출대금이 줄어들게 마련.다급한 마음에 당시 진행 중인 수출계약을 염두에 두고 1000만달러어치의 선물환을 매도했다.

A사 입장에선 달러당 900원에 위험회피를 한 것.하지만 예상과 달리 올 들어 환율이 940~950원대로 급등하면서 A사는 뒤늦은 후회를 하고 있다.

선물환을 서둘러 매도하는 바람에 결과적으로 수출대금 4억~5억원을 까먹게 됐기 때문이다.

은행들이 외환시장에서 투기 바람을 조장하고 있다는 지적이 외환당국으로부터 나왔다.


한국은행은 2006년 1월부터 2007년 9월까지 선물환 취급 규모가 큰 산업 신한 한국씨티 SC제일 칼리온 도이치 등 6개 은행에 대해 금융감독원과 공동조사를 실시한 결과,기업들의 투기성 외환거래 규모가 285억6000만달러에 달했다고 30일 발표했다.

선물환 관련 투기가 198억3000만달러,현물환 관련 투기가 87억3000만달러였다.

그나마 이는 투기적 외환거래 가운데 기업이 매매차익만을 목적으로 현물환 및 선물환을 매매한 뒤 반대 매매로 청산한 금액만 감안한 것이다.

수주금액 이상으로 선물환을 매도하는 경우 또는 수주대금이 정해지지 않았는 데도 미리 선물환을 매도한 경우,그리고 이번 조사대상에서 빠진 은행까지 포함하면 실제 규모는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이 같은 투기적 외환거래로 인해 선물환시장에서 선물환 매도(공급)가 선물환 매입(수요)을 훨씬 앞지르는 등 외환시장의 수급 불균형이 초래됐다는 게 한은의 설명이다.

한은은 이와 관련,은행들이 선물환 투기를 조장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은행들이 외환수수료를 챙기고 시장점유율을 높이기 위해 수출업체를 상대로 마케팅하는 과정에서 환율 하락 전망과 함께 조기 선물환 매도를 권유하는 일이 많다는 것이다.

이은모 한은 외환조사팀장은 "일부 은행은 연간 1000~2000회가량 업체를 방문하면서 거액의 홍보비를 쓰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며 "이 과정에서 과도한 선물환 매도를 부추기는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외환거래의 '투기성'에 대해 논란도 제기되고 있다.

은행들이 자체 환율 전망을 근거로 선물환 조기 매도를 권유하고 기업들도 독자적인 판단을 통해 이를 수용할 경우 투기적이라고 단정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은행들은 또 작년 하반기에는 누구나 달러약세(환율하락)를 예상하면서 선물환 매도가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는 상황 논리를 펴기도 한다.

한은은 그러나 선물환의 원래 목적인 헤지(위험회피) 기능을 넘어섰다는 점에서 투기성이 있다는 입장이다.

또 투기적 외환거래 자체가 위법은 아니지만 이 같은 거래가 기승을 부릴 경우 외환시장의 변동성이 커질 수 있는 데다 이로 인해 기업들도 피해를 볼 수 있다고 밝혔다.

한은은 이에 따라 앞으로 은행들이 투기적 외환거래를 부추기는지 모니터링을 강화할 계획이다.

이와 함께 기업들에도 투기적 외환거래는 자제해 달라고 당부했다.

주용석 기자 hoho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