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에도 색깔이 있다. 똑같은 만원권 지폐라도 사람에 따라 평가하는 가치가 다르다. 뿐만 아니라 같은 사람이라도 상황에 따라 돈의 가치를 다르게 느끼니 돈의 색깔은 수시로 변하는 셈이다.

실생활을 예로 들어보자. 평소 점 찍어두었던 옷과 계산기를 사려고 상점에 갔다. 옷값은 13만원이고 계산기는 2만원이었다. 그때 친한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 상점에서 20분 정도 걸어서 다른 점포에 가면 똑같은 제품을 옷은 12만원에, 계산기는 1만원에 살 수 있다"는 귀중한 정보를 알려주었다. 옷과 계산기 중 하나만 구입한다고 할 때 여러분은 어느 것을 사겠는가.

실험 결과 약 70%의 사람들이 계산기를 사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옷이든 계산기든 20분을 걸어서 절약할 수 있는 돈은 1만원인데,13만원에서 1만원을 절약하는 것보다 2만원에서 1만원을 절약하는 걸 더 가치 있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돈의 색깔은 이처럼 상황에 따라 변한다. 이것은 부부의 은퇴 자금이 당장의 소비나 자녀의 교육비에 비해 가치가 떨어진다고 생각해 은퇴 준비가 지연되거나 실행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다른 예를 살펴보자. 갑자기 전화가 와서 상금에 당첨되었으니 찾아가라고 했다. 지급 조건은 내일 받으면 100만원(A)이고 8일 후에 받으면 115만원(B)이다. 조금 있다 다시 전화가 와서 지급 조건이 변경되었다고 했다. 변경된 조건은 52주 후에 받으면 100만원(C)이고 53주 후에 받으면 115만원(D)이다.

실험 결과 첫 번째 선택에선 B보다 A를 선호하고, 두 번째 선택에선 C보다 D를 더 선호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선택 모두 1주일(내일과 8일 후, 52주와 53주 사이)을 기다리면 15%의 수익이 발생하지만,지급받는 시기가 지금 당장과 1년 후라는 차이가 있다.

이성적 인간이라면 첫 번째 선택에서 A를 결정했으면 당연히 두 번째 선택에서도 C를 결정해야 하는데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사람들은 가까운 장래에 일어날 일은 안전한 방법을 선택(A)하고 먼 훗날에 벌어질 일은 위험한 방법을 선택(D)한다는 것이다.

은퇴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먼 훗날의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후 문제를 놓고 위험한 방법을 선택하는 것은 인간의 속성에 배치되지 않고,실제로 그렇게 하는 사람이 훨씬 많다. 그러나 살다보면 어떻게 되겠지 하는 막연한 대응은 매우 위험한 선택임에 분명하다.

행동재무학을 통해 밝혀진 심적 회계와 시간 지평에 따른 위험 선호도는 의식적이고 체계적인 노력 없이는 은퇴 준비가 매우 어렵다는 점을 말해준다. 따라서 현재의 소비와 자녀교육에 맹목적으로 올인하는 위험한 선택을 멈추고,부부의 노후를 위해 소비생활과 투자가 조화를 이루는 안전한 선택을 하도록 의식적으로 노력하고 계획을 세워야 한다.

미래를 위해 저축하고 투자하는 돈을 좀 더 은퇴 친화적인 색깔로 칠해나가도록 하는 것이 은퇴 설계다. 은퇴 설계를 통해 더욱 보람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고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려는 열정도 갖게 된다.

돈의 색깔(The color of money)이라는 영화에서 왕년의 당구 황제인 폴 뉴먼은 젊은 허슬러인 톰 크루즈와 내기 당구를 하면서 돈을 번다. 그러다가 돈이 목적이 아니라 당구에 대한 자신의 열정을 발견하면서 다시 선수로 뛰어 준준결승에서 톰 크루즈를 이긴다. 그러나 그가 일부러 져준 것을 알고 정식 시합을 요구한다. 톰 크루즈가 "질 게 뻔한데 뭘 믿고 계속 도전하느냐"고 묻자 폴 뉴먼은 "다시 해볼거야(Hey, I'm back)"라고 응수한다.

우리는 일에서 은퇴할 수 있지만 삶에서는 결코 은퇴할 수 없다. 그렇다면 삶의 열정을 끊임없이 데워줄 제대로 된 준비가 필요하지 않을까?

< 김선호 CFP인증자ㆍ한국FP협회 전문위원 yahogoma@unitel.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