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명장 받는 날 하루만 기분 좋지 그 다음부터는 별로입니다.퇴직할 때까지 휴일도 없이 일만 해야 하죠."

이강국 헌법재판소장은 자신의 대법관 시절 경험에 대해 이처럼 말했다.대법관이 법조계에서는 누구나 존경하는 선망의 대상이지만 개인적으로 '삶의 질'은 별로 높지 않다는 것.무엇보다 쏟아져 오는 각종 상고심 소송을 검토하고 판결을 내리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휴일은 물론 설이나 추석 등 명절 연휴에도 출근하는 게 다반사다.휴일에 사무실로 나오는 판사들이 많지만 그들과 점심식사에 어울리기도 꺼려져 도시락을 싸들고 다녔다는게 이 소장의 회고다.

최근 차한성 법원행정처 차장이 신임 대법관으로 제청되면서 대법원의 과중한 업무 부담을 덜어줘야 한다는 지적이 새롭게 제기되고 있다.법원조직법 개정으로 대법관 숫자가 13명에서 14명으로 한 명 늘었지만 법원행정처장을 겸직하는 김용담 대법관은 재판업무에서 제외돼 기존 재판부 구성엔 변동이 없다.

이에 반해 대법원이 처리해야 할 상고심 사건은 그야 말로 폭주하고 있다.법원행정처에 따르면 2006년 대법원이 처리한 상고심 사건은 2만3003건으로 2000년 1만5772건에 비해 46.3% 늘었다.같은 기간 대법관 1인당 사건 부담건수는 1310건에서 1916건으로 증가했다.휴일에도 거르지 않고 업무를 본다 해도 각 대법관이 하루에 5.25건씩 처리해야 한다는 의미다.이는 고법 판사의 13배,미국 연방대법원에 비교하면 무려 237배나 높은 수치다.

이는 무분별한 상고가 많다는데 일정 부분 원인이 있다.상고가 받아들여져 대법원에서 원심이 파기된 비율을 나타내는 파기율은 2006년 민사소송이 5.4%,형사소송이 6.7%를 각각 나타내고 있다.100건 가운데 93건이 넘는 상고가 대법원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의미다.배현태 대법원 홍보심의관(판사)은 "사실관계를 다투는 1,2심과 달리 3심은 하급심의 판결에 법률적 문제가 있는지를 살펴보는 '법률심'인데도 대법원에서 사실관계를 밝혀달라는 상고가 많다"고 지적했다.

업무 부담이 늘어나면서 대법관이 모든 소송기록을 다 검토하지 못해 부실판결로 이어질 수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대법원은 사회적으로 관심이 되는 중요 사건이나 새로운 법률이론의 정립,판례의 변경 등 굵직한 소송에 집중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설명이다.장윤기 전 법원행정처장은 지난해 국회 국정감사에서 "과중한 업무 부담으로 대법관이 모든 기록을 다 볼 수 없다"고 답변했다가 논란이 일자 뒤늦게 이를 정정하는 소동을 빚기도 했다.

대법관의 과중한 업무 부담을 덜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다양한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사법개혁추진위원회는 고등법원에 '상고부'를 설치해 소송가액이 적거나 사안이 경미한 사건의 상고심을 처리하자는 방안을 마련해 국회에 제출한 바 있다.그러나 고법 상고부가 설치되면 5개 고등법원별로 판례가 달라질 수 있어 혼선을 줄 수 있는 데다 같은 고법에서 항소심과 상고심을 모두 진행할 경우 당사자가 승복하지 않을 수 있다는 이유로 국회에서 개정안을 통과시키지 않았다.

또 다른 대안으로 '상고허가제'를 다시 도입하자는 견해도 있다.상고허가제는 상고사건에 대해 법관이 사전 검토해 대법원에서 다룰지 말지를 결정하는 제도로 1980년대에 약 9년간 운영하다 국민들의 재판받을 권리를 침해한다는 비판으로 폐지된 제도다.법원은 대법관 1인이 상고심으로 다룰 만한 소송인가를 충분히 검토해 허가 여부를 결정하기 때문에 사실상 대법원 판결과 같은 효과가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물론 상고심을 줄이자는 데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대형 로펌 소속의 한 변호사는 "아무리 작은 사안이라도 소송 당사자 입장에서는 중요치 않은 게 없다"며 "3심제는 헌법에서도 규정한 국민의 권리"라고 지적했다.변호사업계 입장에서는 수임료가 상대적으로 큰 상고심 사건이 줄어드는 데 대해 내심 반대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윤성원 법원행정처 민사총괄심의관(부장판사)은 "대법원에서 상고가 받아들여질 확률이 매우 낮은 점을 감안하면 상고 자체가 정신적 위로는 되겠지만 실제적으로는 도움이 되지 못한다"며 "대법원이 새로운 판례 확립 등 본연의 기능에 집중하는 게 국민 전체로도 이익"이라고 강조했다.

정태웅 기자 redae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