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례문 화재사건'의 방화범으로 11일 밤 체포된 피의자 채모씨(69)는 2006년 4월 창경궁 문정전 출입문에 불을 질렀다가 체포돼 집행유예를 받은 전력이 있는 동일 인물이었다.

채씨는 숭례문을 두 차례에 걸쳐 사전답사했으며 밤에 경비가 허술하다는 점까지 파악하는 대담성까지 보였다.숭례문이 전소된 당일 오후 채씨는 전처의 거주인 인천시 강화군 하점면 장정리에 있는 마을회관에서 친구들과 태연하게 고스톱을 친 것으로 나타났다.

화투를 함께 친 한 노인은 "어제도 평소처럼 웃고 떠들며 즐겼는데 채씨가 숭례문 화재사건의 방화 범인일 줄은 꿈에도 생각치 못했다"며 놀라워 했다.

◆채씨의 범행 동선

경찰조사에 따르면 채씨는 설 연휴 마지막날인 지난 10일 밤 강화도 하점면 장정리를 출발,일산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서울시청 부근에서 하차했다.이후 숭례문까지 걸어간 채 씨는 오후 8시45분께 숭례문 좌측(서쪽) 비탈로 올라간 뒤 가져온 접이식 알루미늄 사다리를 타고 숭례문 내부로 들어갔다.

채씨는 2층 누각으로 올라가 시너가 든 1.5ℓ짜리 페트병 3개 중 1개를 바닥에 뿌리고 2개는 옆에 놓은 후 갖고 있던 일회용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범행을 마친 채씨는 현장에 접이식 사다리 1점,라이터 1점,배낭을 버려두고 침입했던 경로로 되돌아 내려온 뒤 신호 대기 중인 택시를 잡아탔다.

인근 지하철역에서 내린 채씨는 지하철과 노선버스 등을 이용,경기도 일산에 사는 아들의 집으로 갔으며 다음 날 새벽 전처가 거주하는 강화도로 이동했다.

◆범행 동기

경찰 조사 결과 채씨는 경기도 일산에 갖고 있던 노후주택(약 30평 규모)에 대한 보상액이 적었던 게 문화재 방화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으로 드러났다.서울 남대문경찰서 관계자는 "보상금이 채씨가 요구한 4억원보다 한참 적은 9600여만원으로 결정되자 이에 불만을 품고 잇따라 방화를 저지른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고양시 관계자도 "채씨가 2003년 시공사인 H건설을 상대로 한 행정소송에 패소한 이후 고양시,대통령 비서실 등 각급 기관에 민원을 제기했지만 모두 허사로 돌아갔으며 결국 2006년 3월 해당 주택에 대한 철거가 이뤄졌다"고 말했다.

채씨는 이번 방화에 앞서 2006년 4월 창경궁 문정전 출입문에 불을 질렀다가 문화재보호법 위반으로 징역 1년6개월,집행유예 2년 등을 선고받기도 했다.당시 법원은 채씨가 피해 회복을 위해 600만원을 공탁한 점,고령인 점,특별한 전과가 없는 점 등을 감안해 집행유예 처분을 내렸다.

하지만 경찰은 "이때 법원이 부과한 1300만원의 추징금을 내지 못해 채씨의 생활이 더욱 쪼들리자 오히려 2차 범행에 대한 결심을 굳혔을 것"이라고 말했다.

12일 오전 서울지방경찰청에서 남대문경찰서로 이송된 채씨는 "국민에게 미안하고 가족에게 미안하다"라는 말을 되풀이했지만 이미 때늦은 후회에 불과했다.

◆범행이후 행적

채씨는 화재 발생 이틀째인 11일 낮 동네 마을회관에서 친구들과 함께 태연히 고스톱을 친 것으로 조사됐다.오후 7시40분께 탐문수사를 벌이던 경찰에 체포되기까지 그는 평소처럼 친구들과 어울려 주변 사람들이 전혀 눈치를 못 챘다고 한다.

당시 마을회관에 있었던 유모씨(77)는 "마을회관에 낮 12시 정도 지나 노인들이 하나둘 모여들면서 20여명이 됐는데 그중에 채씨도 있었다"며 "표정에서는 그다지 불안하다거나 이상한 점을 느낄 수 없었고 평소처럼 웃고 떠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채씨는 평소 술을 줘도 거의 안 마시는 편이었고 1년반 전 동네로 이사왔으며 평범한 사람으로 생각했는데 숭례문 방화사건의 범인이라니 놀랍다"고 밝혔다.주민들은 채씨가 창경궁 문정전에 불을 지른 전력이 있고 토지보상 문제로 분을 삭이지 못한 상태인 사실도 전혀 알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모씨(73)는 "같이 어울려 술을 마신다거나 하면 자기 속 얘기를 털어 놓을 텐데 채씨는 평소 술 담배를 전혀 하지 않아 채씨에게 그런 사정이 있는 줄 몰랐다"며 "채씨가 숭례문에 불을 질렀다는 사실이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고 전했다.

최순식 장정2리 이장(65)은 "2006년 9월 강화로 이사와 처음엔 마을사람들과 관계가 뜸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마을회관 출입도 잦아지고 다른 노인들과도 잘 지냈다"며 "비교적 솔직한 사람으로 보였는데 왜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호기/이재철 기자 hg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