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황 < 명지대 교수·국제통상학 >

1929년 10월 주가폭락으로 촉발된 미국 대공황(大恐慌)을 극복한 주역은 루스벨트 대통령과 영국 경제학자 케인스였다.대공황 당시 4년 동안 공산품 생산량은 44%나 감소했고,근로자의 30%가 일자리를 잃었으며,미국의 무역 규모는 4분의 1 수준,세계 무역 규모는 3분의 1 수준으로 감소했다.

루스벨트의 위기 돌파력은 케인스의 거시경제적 안목에서 비롯됐다.케인스는 불황의 늪에 빠진 순수 시장경제의 한계점을 보완하기 위해 정부의 재정지출을 확대해 일자리를 제공하고 소득과 소비 지출을 증대시켜 마침내 과잉 생산 공급의 동맥경화증을 해소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제시했다.1933년 케인스는 남의 나라 대통령에게 "대규모 재정 지출 계획을 추진하도록" 권고하는 편지를 보냈다.두 사람은 유효수요의 증대라는 바늘로 미국과 세계 경제의 막힌 혈관을 뚫었다.경제는 순환구조임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체중이 70kg인 남성의 몸속에는 5.6ℓ의 피가 쉼 없이 순환한다.1분이면 온 몸을 한번 돌아온다.'피'가 응고되면 생명체의 수명이 다하는 것처럼,'돈'의 흐름이 정체되면 자본주의 경제는 마비된다.돈이 '많은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돈이 빨리 '순환하는 것'이다.부동자금이 저축과 투자로 이어져 산업자본으로 활용될 수 있는 선순환 구조를 유도하는 것이 통화량 증가나 감세 조치와 반드시 병행돼야 하는 이유다.

500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는 부동(浮動) 자금이 동맥경화증에 걸린 이유는 간단하다.첫째 경제가 불안했기 때문이다.투자심리를 위축시키는 것은 오늘의 경기침체보다 내일의 불확실한 경기변동이다.주식시장의 변동성이 너무 크다.하루에도 5% 폭으로 오르락내리락 하기가 일쑤다.부동산 시장은 불안한 안정세를 간신히 유지하고 있다.해외 현물시장이나 선물시장에서 투자 활로를 찾기에는 아직 자신감이 없다.

둘째 소득증대 과정이 안정적이지 못했기 때문이다.마치 끼니를 거르다가 과식이나 편식을 하면서 건강을 해치는 경우와 같다.소득 증대를 예상하고 이에 따른 소비나 저축 방식을 계획할 겨를을 가지지 못한 것이다.전 국토가 동시에 개발 대상이 되면서 거액의 토지 보상금이 지급된 경우가 그 단적인 예다.갑작스러운 돈벼락이 떨어졌지만 적절한 소비나 저축으로 이어지지 못한 단기 유동자금은 오히려 시장에서 예측 가능성을 교란시키게 되었다.

셋째 돈을 벌기에만 열중한 나머지 '사용'할 줄은 모르기 때문이다.영양분을 섭취하기만 하고 운동은 부족한 경우와 마찬가지다.

우리 경제에서 혈액 순환이 막힌 부문은 여러 군데다.새로운 성장 동력과 경제성장이 막혔고,기업 투자 확대와 양질의 일자리 창출 구조가 막혔으며,소득 격차의 해소와 내수 활성화의 흐름도 막혔다.참여정부에서 국가 부채를 갑절이나 늘렸고 공무원 수도 10%나 증가시켰지만 우리 경제의 동맥경화증은 오히려 악화됐다.

부동 자금을 산업자본으로 순환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자금의 선순환 구조를 열어 주어야 한다.투자가치와 수익성이 예견될 수 있도록 경제 여건의 불확실성을 제거하는 것이 급선무다.또한 자금이 활기차게 순환할 수 있도록 심장 박동을 강화해야 한다.직접적인 경기 부양책의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민간 경제활동에 동기를 부여하고 유인책을 제공하는 수준을 획기적으로 향상시켜야 한다.'피'와 '돈'은 막힘없이 순환해야 몸을 살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