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례문이 불길에 휩싸일 때 우리 민족의 자존심이 불탄다는 생각이 들었죠.제 살을 에는 듯하더군요.불타는 숭례문의 모습을 화폭에 담아내 홀대받은 문화적 자존심을 살려내고 싶습니다.문화대국으로 가는 길목에서 경종도 울리고 말입니다."

문화재 지킴이를 자처하며 '국보 1호' 숭례문 화재 사건을 화폭에 담아내기 위해 3개월간의 대장정에 나서는 중견 화가 전준엽씨(55).

기자,큐레이터 등 다양한 경력을 지닌 그는 지난 10일 발생한 숭례문 방화 참사에 충격을 받고 '대한민국 국보1호 숭례문,2008년 2월10일(320×130㎝)'이란 제목으로 현대적 한국화풍의 서양화 작품을 준비하고 있다.

"이번 참사를 계기로 문화재 보호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고 문화적 정체성과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우리 스스로의 자기반성 의지까지 화면에 그려넣고자 합니다.화재 현장을 자세히 묘사하고 역사적 배경도 화필로 설명할 겁니다."

밑그림 구상을 끝낸 전씨는 삼성 비자금으로 구입했다는 의혹을 받은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 등 미국의 팝아트 작품과 현대적 건물을 뒷배경으로 깔고 숭례문의 불타는모습을 생생하게 채색할 계획이다.

건물의 기하학적인 요소와 불길에 휩싸인 숭례문의 구상적인 질감을 배합하면서 작품의 골격도 유지할 생각이다.

그는 "숭례문의 주변을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처럼 관념적으로 그리되 최근 과도하게 부각된 서양의 팝아트를 오버랩시켜 '우리 미술,한국의 그림'으로 그려내겠다"고 강조했다."풍경화는 보이는 것만을 그린 게 아닙니다.예를 들면 하나의 그림에 정면에서 본 숭례문과 언덕위 오두막에서 내려다 본 건물 숲 등 다양한 시선이 녹아있지요.기본적으로 캔버스에 유화를 쓰되 기법도 다양하게 사용할 겁니다."

그는 5월 말께 작품이 완성되는 대로 서울 소격동 빛갤러리에서 열리는 18번째 개인전에 이 작품을 출품하겠다고 밝혔다.

"소중한 문화재가 불타는 모습을 그린 사례는 외국에서도 많습니다.영국의 풍경화가 윌리엄 터너의 1834년작 '국회의사당 화재사건'과 13세기 일본 가마쿠라시대의 '산죠오전(三條殿)의 화재'가 대표적이지요."

윌리엄 터너(1775~1851년)는 1834년 10월에 발생한 템즈 강변 국회의사당의 화재 광경을 생생하게 그려 주목을 받았다.일본의 '산죠오전의 화재'는 교토 지역의 문화재인 산죠오전에서 일어난 화재 현장을 그린 작품이다.

중앙대에서 회화를 전공한 그는 10년간 일간지 기자로 활동하다 성곡미술관 설립 초창기부터 참여했다.이후 학예실장으로 있으면서 신정아씨를 큐레이터로 뽑은 뒤 2004년 물러날 때까지 9년간 성곡미술관 운영을 주도했다.

글=김경갑/사진=강은구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