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에서 철근,식료품,시멘트까지….'

"더 오르기 전에 사서 쌓아두자"는 '사재기 심리가 확산되면서 생활필수품부터 중간 생산재에 이르기까지 수급 불균형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공급 및 유통업체들은 출하물량을 줄이는 반면 소비자들이나 수요업체들은 조금이라도 많은 물량을 확보하는데 열을 올리고 있어서다.

이에 따라 정부는 이날 재정경제부,건설교통부,산업자원부 합동으로 철강업체와 건설업체들을 대상으로 인천,광주광역시,판교 등에서 철근 매점매석 실태조사에 들어갔다. 업계에서는 그러나 이번 수급불안이 국제 원자재값 폭등과 세계 경기침체 등 외부 요인에서 촉발된 만큼 정부의 사재기 단속이 실효를 거두기 쉽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건설업계,철근 수급 대란 우려

가뜩이나 주택경기 침체에 시달리는 건설업계는 요즘 주요 건자재인 철근을 구하느라 매일 전쟁을 벌이고 있다. 철근값이 크게 올랐지만 원하는 물량을 확보하기는 어렵다. 가격폭등에 수급불안까지 겹쳤기 때문이다.

A건설사 자재구매담당 직원은 "철근 가격이 최근 10% 이상 오른 가운데 일부 철강제품 대리점들이 사재기에 나서면서 돈을 주고도 원하는 물량을 얻어내기가 하늘의 별따기"라고 말했다. 올 들어 두 달 동안 철근 값은 15%(t당 10만원) 이상 올라 '철근 파동' 조짐마저 보인다.

철근은 건설업체들이 구매하는 전체 자재의 25%에 달할 정도로 비중이 크고,공사원가에 미치는 영향이 막대하기 때문에 업체들이 울며 겨자 먹기식로 물량확보에 나설 수밖에 없다. 업계 관계자는 "철강제품은 다른 제품과 달리 아무렇게나 쌓아둬도 변질되지 않아 쉽게 사재기 대상이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강도는 덜하지만 시멘트도 사정은 비슷하다. 쌍용양회 등 업체들은 이달 초 t당 시멘트 값을 6000원씩 올렸다. 이에 따라 수도권 시멘트 유통 가격은 t당 5만3000원에서 5만9000원으로 11.3% 올랐다.

업계 관계자는 "원자재 가격 급등 여파로 시멘트 값이 치솟았는데 설상가상으로 폭설 등의 여파로 중국이 시멘트 제조에 쓰이는 연료인 유연탄에 대해 수출 금지조치를 내리면서 수급이 갈수록 꼬이고 있다"고 말했다. 건설경기가 성수기로 접어드는 4월까지 중국의 수출금지 조치가 풀리지 않을 경우 쌍용양회와 현대시멘트 등은 공장 가동 중단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때문에 눈치빠른 일부 업체들이 벌써부터 시멘트 사재기에 나서는 움직임도 보이고 있다.

한 중견 건설업체 현장소장은 "주택시장 침체로 미분양이 쌓이면서 골머리를 앓고 있는데 건자재 가격마저 무섭게 오르고 있어 당혹스럽다"며 "건자재 값 상승분을 분양가에 전가시킬 수도 없어 건설업계 전반에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고 말했다.


◆식품.식자재 유통시장도 대혼란

이미 전국적으로 '라면 사재기'가 벌이지고 있는 가운데 식품 및 식자재 유통 시장 질서도 갈수록 혼탁해지고 있다.

식품 대리점을 통해 전국 음식점에 밀가루 대두유 전분류 등을 공급하는 CJ푸드시스템은 지난해 하반기 말부터 하루 수요량의 20% 정도를 공급하지 못하고 있다. 추가 가격 인상을 예상한 대리점과 식당들이 미리 비축했다가 가격이 더 올랐을 때 내다팔기 위해 사재기에 나선 탓이다.

식자재 유통업체들은 원자재 값 급등 여파로 다음 달께 밀가루 값도 추가 인상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CJ와 대한제분 등에서 일주일 물량으로 400t씩 밀가루를 공급받고 있는 롯데제과는 앞으로 3주치 물량을 확보했지만 추가 물량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밀가루와 함께 식용유 등에 대한 가수요도 증가하자 농수산물유통공사는 올해 콩 해외수입 예정 물량(15만t)의 절반인 8만t을 이달 말까지 앞당겨 도입키로 했다. 지난해 같은 기간에 도입한 물량보다 3배가량 많은 수준이다.

농수산물유통공사 관계자는 "지난달 콩 가격은 지난해 1월에 비해 100% 상승하는 등 가격 인상 압력이 거세 상반기 수급 안정을 위해 연초 수입 물량을 대폭 늘렸다"고 말했다.

CJ.대상 등 식품업체들은 원자재 가격 상승이 하반기까지 이어질 것으로 예상하고 원자재 비축 전략을 다각도로 세우고 있다. 밀.콩.옥수수 등의 수입처를 기존의 미국.호주 등지에서 동남아와 남미대륙에까지 확대한다는 전략이다.

업계 관계자는 "라면이나 밀가루 건자재의 사재기 현상은 공급량이 달려 발생한 측면도 있지만 그보다는 추가적인 가격 인상을 우려한 불안 심리가 더 큰 원인"이라며 "투기가 투기를 부르고 막연한 불안감에 남들 따라 사재기에 동참하는 현상이 심화될 경우 산업계는 물론 서민경제도 큰 타격을 입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건호/박영신/오상헌/장성호 기자 leek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