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4월,샤프 마쓰시타 도시바 등 일본을 대표하는 전자기업 경영진들이 도쿄 시내의 한 호텔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차세대 LCD패널을 개발하기 위해 일본 내 20여개 LCD업체가 공동으로 '퓨처비전'이란 컨소시엄을 결성키로 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였다.한국 기업에 내준 LCD패널 주도권을 되찾아 오기 위한 일본 기업들의 자구책이었다.

당시 니혼게이자이신문은 "퓨처비전 결성은 샤프를 중심으로 LCD연합체를 만들라는 일본 경제산업성의 의도에 따른 것"이라고 보도했다.경제산업성은 당초 컨소시엄에 소니를 참여시킬 계획이었으나,소니가 삼성전자와 7세대 패널사업을 합작했다는 이유로 배제시켰다.

퓨처비전 출범 과정은 최근 한ㆍ일 전자기업 간 경쟁에서 일본 정부의 역할을 여실히 보여준다.일본 정부가 자국 전자업체들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것은 2000년 초반.삼성전자가 1992년 세계 1위였던 도시바를 제치고 D램 반도체 선두기업으로 올라서고 2001년 낸드플래시에서도 도시바를 제치자 일본 정부는 한국 전자기업 견제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국내 업계 관계자는 "한국에 빼앗긴 전자산업 주도권을 되찾기 위해 일본 정부는 지난 10년간 막후에서 자국 전자업계 재편을 주도했다"며 "기업 간 경쟁구도에 '제3의 플레이어'로 뛰어든 셈"이라고 설명했다.

실제 퓨처비전 외에도 일본 정부의 막후 지원 사례는 많다.1999년 히타치와 NEC,후지쓰,도시바,미쓰비시 등 5개 기업이 '엘피다 메모리'란 합작사를 설립한 것도 일본 경제산업성의 권유에 따른 것이었다.D램 시장에서 삼성전자,하이닉스반도체에 맞설 '대항마'를 키워낸 것이다.2005년 마쓰시타,히타치,도시바 등 3개사가 연합해 만든 LCD합작사 'IPS알파 테크놀로지' 역시 일본 경제산업성의 작품이었다.

정부뿐만이 아니다.일본 내 각 지방자치단체들도 자국 전자기업에 아낌없는 지원을 하고 있다.대표적인 사례가 오사카 사카이(堺)시.사카이 시정부는 지난해 샤프의 10세대 LCD패널 공장을 유치하기 위해 350억엔 상당의 보조금 및 세제 혜택을 줬다.

일본 기업이 정부,지자체로부터 측면 지원을 받는 것과 달리 국내 전자업체들은 홀로 고군분투 중이다.반도체산업협회,전자산업진흥회 등의 단체는 있지만 산업자원부(현 지식경제부)와의 협력시스템은 제대로 작동되지 않고 있다.그나마 지난해 4월 삼성전자와 LG전자 주도로 출범한 한국디스플레이산업협회를 중심으로 LCD,PDP 패널분야 협력방안을 모색 중이다.디스플레이협회 관계자는 "지금 한국 기업들은 혼자서 일본의 정부,기업,지자체 등 세 명과 싸우고 있는 셈"이라고 지적했다.

이태명 기자 chihir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