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3일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의 한마디에 국제 유가는 하루 만에 2% 폭등했다.

차베스 대통령은 미 연방법원이 미국 내 베네수엘라석유공사(PDVSA)의 현금자산 3억달러를 동결하라고 명령한 데 반발,미국에 석유를 수출하지 않겠다고 선포한 것이다.

차베스는 베네수엘라가 미국에 원유 공급을 중단할 경우 유가는 배럴당 200달러까지 치솟을 수 있다며 엄포를 놓았고,불안해진 투자자들이 석유 매입에 나서면서 유가는 100달러 선을 다시 넘어섰다.

미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부실로 살얼음판이 된 세계 경제에 또 다른 암초가 등장했다.

원유와 가스,철광석 등 자원을 무기로 국가의 패권을 강화하는 '자원 민족주의(resource nationalism)'가 그것.베네수엘라를 비롯한 산유국들이 원유값을 좌지우지하고,러시아는 풍부한 천연가스를 내세워 유럽에 대한 영향력을 극대화하고 있다.

최대 석탄 생산국인 중국과 주요 철광석 공급 국가인 호주도 이 같은 흐름에 동승했다.

◆풍부한 자원,국가 권력의 무기로

1970년대 세계를 수렁에 빠뜨린 오일쇼크의 악몽이 부활하고 있다.

당시 석유를 중심으로 한 자원의 무기화는 1980년대 들어 시장 개방 흐름 등에 힘입어 사라진 듯했다.

하지만 최근 세계적인 원자재 수요 급증이 상황을 다시 바꿔놓고 있다.

매년 두 자릿수의 고성장을 기록하고 있는 중국에서는 지난해 상반기 처음으로 석탄 수입량이 수출량을 넘어섰다.

국가 간 자원 확보 경쟁이 격화하면서 원자재 수출국의 목소리는 한껏 높아졌다.

중남미와 중동에 부는 사회주의와 반미 바람은 자원 분쟁을 부채질하고 있다.

1999년 베네수엘라에서 사회주의 정책을 표방하며 차베스가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중남미에서는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볼리비아 칠레 에콰도르 등 잇따라 좌파정권들이 들어섰다.

이들은 국부의 해외 유출을 막기 위해 자원을 국유화하고 서구 자본에 배타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차베스 정부는 PDVSA와 외국 석유회사 간 기존 원유 생산 계약을 무효화하고 정부 소유의 합작회사 설립을 추진 중이다.

여기다 최근 몇 년간 원유와 원자재 가격이 강세를 보이면서 자원보유국들이 상당한 부를 축적했다.

개방 직후 부진을 면치 못하던 러시아 경제는 풍부한 석유와 천연가스를 기반으로 2007년 세계 3위의 외환보유 국가로 우뚝 섰다.

더 이상 서구 대기업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게 된 것이다.

이 같은 자신감을 바탕으로 자원부국들은 국유기업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다.

아제르바이잔은 신규 개발되는 유전에 대해 국영 석유회사인 SOCAR가 지분의 절반 이상을 소유하도록 규제하고 있다.

현재 세계 1위 석유업체는 세계 생산량의 13.6%를 차지하고 있는 사우디아라비아 국영기업 아람코(2006년 기준)다.

이외에도 세계 10대 석유업체 중 절반은 이란 베네수엘라 중국 멕시코의 국영기업이 차지하고 있다.

미국의 엑슨모빌,영국의 BP 등 나머지 메이저 기업들을 합쳐도 이들 생산량의 절반에 못 미친다.

◆철광석 농산물 등으로 확산

21세기판 자원 민족주의 무대는 석유 시장뿐만 아니다.

지난해 러시아의 국영 가스회사인 가즈프롬은 천연가스 가격 인상을 둘러싸고 우크라이나와 분쟁을 빚었다.

우크라이나가 인상안에 불응하자 가스 공급을 전격 중단했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에서 유럽으로 수출되는 가스관을 막으면서 맞섰고 유럽연합(EU) 국가들은 애꿎은 '가스난'에 허덕여야 했다.

벨로루시와 그루지아 아제르바이잔은 최고 114%에 달하는 가격 인상안을 지난해 받아들였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2005년 민영 석유회사인 시브네프트 인수 등을 통해 가즈프롬을 천연가스 생산량 세계 1위의 공룡으로 키워놨다.

세계 3대 철광석 공급업체인 브라질의 발레도리오도체(CVRD)는 한국 포스코와 일본 신일철 JFE스틸,중국의 바오산 등에 공급하는 철광석 가격을 4월부터 65% 인상하기로 했다.

호주의 광산업체 리오틴토와 BHP빌리톤도 최대 154% 인상을 요구하며 제철업체에 압력을 가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자국의 철강산업이 크게 성장하면서 철광석과 원료탄 등 원자재 수요가 높아지자 철광석과 고철 수출을 규제하고 있다.

농산물도 예외가 아니다.

최근 곡물 수급 부족과 이로 인한 물가 상승을 우려한 각국 정부들은 수출 제한 조치에 나섰다.

◆글로벌 인플레 주범으로 떠올라

이런 움직임은 세계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다.

공급 부족과 투기자본 가세로 가뜩이나 불안한 원자재 시장의 가격 상승세는 더 가팔라지고 있다.

최근 브라질 CVRD 등의 인상 합의로 철광석 값은 5년 전보다 4배 이상 오른 상태다.

영국 시장조사기관인 멥스의 피터 피시는 "향후 철강업체들이 생산하는 철강 제품 1t당 90달러에 이르는 추가 비용 지출을 감수해야 할 것"으로 전망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지난 1월 중국에 내린 폭설로 국제 석탄 가격이 급등세를 타고 에너지 관련 비용이 높아지는 등 '나비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고 최근 보도했다.

중국은 1월 폭설로 인한 전력 수급을 우려하며 석탄 수출을 한시적으로 금지했다.

이 조치가 발표되자 아시아 석탄 가격은 일주일 새 34% 급등했다.

세계적인 석탄 생산업체인 피보디에너지의 빅 스벡 이사는 "베이징의 수요 증가와 수출 제한 조치가 석탄값에 전례 없는 불안감을 더하고 있다"며 호주 등 다른 생산국이 이 같은 흐름에 동조할 경우 세계적인 인플레이션 요인으로 작용할 것으로 우려했다.

권위 있는 경제잡지 이코노미스트는 석유자원을 무기로 내세우는 민족주의적 움직임을 최근 국제 유가 급등의 핵심 원인으로 지목했다.

베네수엘라 정부와 갈등을 겪고 있는 엑슨모빌의 마크 알버스 부사장은 지난달 한 에너지포럼에 참석,"에너지 자립을 노리는 일부 국가의 자원 민족주의가 기업 투자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21세기판 '오일 쇼크' 올까

월가의 큰손인 조지 소로스는 "미국발 금융위기가 전 세계적인 경기침체로 이어지는 와중에 각국의 자원 민족주의로 인플레이션이 심화되고 정치적 긴장이 조성되면 글로벌 경제가 붕괴할 수도 있다"며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보다 더 심각한 문제"라고 주장했다.

분석기관인 글로벌 인사이트는 유가가 10달러 상승할 경우 2년간 세계 GDP가 0.5% 감소할 것으로 전망했다.

하지만 자원 민족주의의 영향이 70년대 오일쇼크 당시처럼 극단적인 것이 될 것인지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다.

오일쇼크를 겪은 각국은 자원 효율성을 높이고 대체에너지 개발로 해외 자원 의존도를 낮추는 등 대책을 마련해왔다.

한국은행 해외조사실 신원섭 종합분석팀장은 "중동 지역에 대한 원유 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와 달리 중국은 아시아 및 아프리카 등으로 수입선을 다변화하는 등 나름의 성과를 거두고 있다"며 "자원 민족주의가 국가 안보 차원에서도 큰 문제로 떠오른 만큼 대체에너지 개발과 에너지 소비 절약 등 다양한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유미 기자 warmfron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