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의 비즈니스 중심지로 '낮의 거리'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마루노우치.유흥업소가 몰려 있어 '밤의 거리'로 불리는 롯폰기.도쿄의 낮과 밤을 각각 대표하는 두 지역이 요즘 재개발 경쟁에 한창이다.

지난해 도쿄역 바로 옆에 들어선 지상 33층,지하 4층짜리 신마루노우치 빌딩은 은행 증권 쇼핑몰 등이 입점하면서 도쿄역의 새로운 명소로 자리잡았다.

롯폰기에는 54층(지상 248m)짜리 '도쿄미드타운'이 들어서며 도쿄타워가 갖고 있던 일본 최고층 건물의 자리를 빼앗았다.

'비루 랏슈(빌딩 러시)'라는 신조어까지 탄생시킨 도쿄 거리 곳곳의 재개발 붐만 놓고 보면 '잃어버린 10년'에서 벗어난 일본 경제의 회복세가 여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일본 경제 내부의 속사정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복잡했다.

◆회복 지속이냐 후퇴냐

일본 게이단렌(經團連ㆍ경제단체연합회) 경제홍보센터의 주선으로 한국 언론인들을 만난 일본의 재계ㆍ연구소ㆍ학계 인사들이 공통적으로 들려준 얘기는 전후 최장기 경기 회복국면이 꺾이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확산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일본의 소비자 심리지표는 현재 악화일로다.

내각부가 최근 발표한 지난달 소비자태도지수는 37.5로 전월에 비해 0.5 떨어졌다.

4개월 연속 하락하면서 2003년 6월 이후 가장 낮은 수치로 내려앉았다.

기업들의 경기 심리도 마찬가지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이 지난달 134개사 최고경영자(CEO)를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 조사 결과,'일본 경제가 회복되고 있다'는 응답은 64%였다.

작년 10월 79%보다 15%포인트 하락한 것이다.

국제 원자재 상승과 미국 등의 경기 후퇴에 일본인들이 과민하게 반응하면서 가속화하고 있는 주가 급락과 소비 위축은 일본 사회에 또다른 위기감을 증폭시키고 있다.

경제홍보센터의 다테이시 노부오 부회장(오므론 상담역)은 "작년 한햇동안 도쿄 증시의 시가총액이 20.8% 감소하면서 117조엔이 증발했고,올 들어 1월 한 달에만 9.5%가 더 떨어져 47조엔이 또다시 사라졌다"며 "일부에서는 일본 경제의 몰락을 경고하는 성급한 목소리까지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고개 드는 '개혁 후퇴' 우려

BNP파리바증권 도쿄지점의 고노 류타로 경제조사본부장은 '일본 경제의 양극화'를 화두로 던졌다.

2001년 4월부터 5년반 동안 재임한 고이즈미 전 총리가 공공건설 지출을 10% 이상 삭감하고 지방재정 교부금을 대폭 축소하는 등 재정 재건을 강력하게 추진한 결과 일본의 각 지방이 예전과 같은 여유를 누리기 힘들게 됐다는 것이다.

'잃어버린 10년'을 딛고 되살아나는 듯 했던 일본에 경제 위기론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는 배경엔 후쿠다 야스오 정권의 개혁 후퇴에 대한 우려가 짙게 깔려 있다.

작년 9월 취임한 후쿠다 총리가 입으로는 성장우선 개혁정책을 말하지만 실제는 개혁이 지지부진하다는 의심을 받고 있는 것.도로 건설과 의료정책에서 고이즈미 시절과 달리 개혁의 고삐가 많이 풀어져 있다는 지적이다.

미쓰이물산 전략연구소의 데라지마 지쓰로 소장은 "경제가 어려울 때 부실 지자체와 산업의 구조조정 등 개혁의 액셀러레이터를 더 세게 밟아야 하는데,지난해 7월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참패한 이후 후쿠다 정부가 재정긴축과 의료개혁의 페이스를 늦추는 등 농촌 기득권층의 눈치를 지나치게 보고 있다"고 비판했다.

◆'미래'에 올인하는 기업들

정부가 엉거주춤하는 동안에도 일본 기업들은 '미래'를 키워드로 한 친환경ㆍ바이오 등 분야에서의 세계 최고 수준 기술 축적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황무지에서 비료 없이도 한 해 10m씩 자라는 갈대 등의 작물을 개발,2015년까지 ℓ당 40엔(약 350원) 이하인 바이오에탄올을 생산한다는 계획을 세운 신일본석유가 대표적 사례다.

혼다는 "자동차의 미래는 궁극적으로 연료전지차가 될 것"이라는 확신 아래 30년 앞을 내다보고 수소 공급 연료전지차 개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고,NEC는 제품 라이프 사이클과 전 생산 공정에 걸쳐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고 있다.

일본 경제의 미래는 여전히 기업들이 쥐고 있었다.

도쿄=이학영 부국장ㆍ산업부장 ha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