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그 상황에 처했다면 나같이 행동했을 것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유태인 수용소장을 맡아 학살에 앞장서다 전범재판에서 교수형을 선고받았던 루돌프 헤스의 법정 진술 중 한 대목이다.그가 저지른 범죄의 크기를 볼 때 터무니없는 변명이지만 "나는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는 그의 항변에는 조직의 이름으로 저지른 범죄를 어디까지 개인에게 물을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케 한다.

18대 총선을 불과 한 달 남겨놓고 벌어진 통합민주당 지도부와 공천심사위원회의 비리전력자 공천기준 논쟁의 핵심은 어디까지가 봐줄 수 있는 비리냐의 문제였다.비리 및 부패로 금고 이상의 형을 선고받았을 경우 예외없이 공천 대상에서 제외하겠다는 공심위 방침에 일부 의원들은 "문제의 순간에 문제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책임을 떠안은 사람들의 시체를 짓밟고 우리만 살겠다고 행군할 수는 없다"며 반발했다.당 지도부도 개인이 아니라 당과 대선후보를 위해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경우에는 구제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줘야 한다고 요구했다.일부 비리 전과를 갖고 있는 당 주요 인사들이 다음 총선에 나올 수 있는 면죄부를 부여하자는 것이다.'졸(卒)이 무슨 잘못이 있느냐'는 것이다.

당 지도부와 의원들이 오랫동안 정치를 같이 해온 동료들을 싸고도는 것은 인간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다.출처야 어떻든 기업들로부터 받은 돈은 각종 선거에 요긴하게 썼을테니 그들이 고맙고 처벌받길 원치 않을 것이다.하지만 그들은 법적으로 분명한 위법을 저질렀고 징역을 선고받아 형을 살거나 집행유예로 풀려났다.사법적 처벌과 당의 판단은 별개의 문제일 수 있지만 총선에 나서는 정당의 도덕적 기준이 국민의 잣대와 다르다면 표를 달라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현대 독일군에는 비인간적인 명령에 대해서는 거부할 권리가 주어진다.개인의 범죄를 조직의 탓으로 돌리는 헤스와 같은 군인이 다시는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그런 점에서 민주당 공심위가 금고 이상의 전력자를 공천대상에서 배제키로 한 것은 당보다는 국민의 잣대에 다가선 결정이라고 할 수 있다.

노경목 정치부 기자 autonom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