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혜숙 < ks+partners 이사 hslee@ks-ps.co.kr >

광고 일을 시작하면서 맞닥뜨린 가장 큰 딜레마는 내가 '을'이란 현실이었다.카피라이터로 입사했지만 광고주와의 모든 미팅에 참석하는 것이 최고의 교육이라고 믿으시던 첫 직장 사장님의 배려 덕에 광고주인 '갑'과의 만남은 하루가 멀다 하고 이어졌다.

'을'녀의 기본자세는'한결같은 미소'였다.그분들 의견이 말이 안돼도 미소를 지어야 했다.물론 속으로는 어떻게 하면 '갑'의 기분을 살려주면서 '을'의 의도대로 끌고 갈 것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작전을 짜면서 말이다."우리 광고만 왜 이렇게 짧으냐"(온에어되는 광고는 칼같이 15초,20초,30초다),"우리 광고는 왜 뉴스데스크 뒤에 안 붙냐"(돈을 많이 내면 당연히 가능한 일이다)는 식의 원성은 설명해주면 되는 일이다.문제는 촬영이 다 끝난 광고를 "다 좋은데 모델만 바꿔 달라"든지 "왠지 마음에 안 든다"는 식의 클레임이다.그러나 이런 얘기에 화를 내거나 얼굴을 붉히는 것은 '을'로서의 기본기가 부족한 것이다.

집에서도,학교에서도,애정사에서도 '갑'의 위치를 놓치지 않았던 내가 '을'로 변신하기 위해 기울였던 노력은 눈물겨웠다.덕분에 가족들에게 "성격 좋아졌다"는 칭찬까지 듣게 됐으니 나의 변신은 일단 성공적이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갑'녀에서 '을'녀로의 변신이 피곤할 수밖에 없었던 나는 회사 규모가 작아서 '을'녀로서의 스트레스가 심한 것이라고 오판했다. 그래서 규모가 제일 큰 회사로 옮겼다.웬걸,그곳은 '인하우스 에이전시'인 만큼 정략결혼 당한 당사자들끼리의 갈등이 있었다.'갑'이 원했던 '을'이 아니라,집안에서 정해준 '을'이니 오죽했겠는가….

그러던 어느날 광고주로부터 납득하기 힘든 수정지시가 떨어진 듯했다.10여분 동안 전화를 받던 옆자리 선배 왈 "그러시면 저희와 일 못하십니다." 순간 우리팀에는 정적이 감돌았다.띵했다.아,저런 방법이 있었네.'을'이'갑'보다 100만배 멋져 보이는 역사적인 현장이었다.사람은 인상적인 장면을 슬로비디오로 기억한다고 하지 않는가.그 날 그 순간이 그랬다.선배가 '을'로서의 자존심을 지키는 그 장면이 뇌리에서 잊혀지지가 않았다.

그 때부터 '을'의 자존심,특히 크리에이티브에 관한 자존심을 지키는 최후통첩을 마음 속에 품고 다니기 시작했다.때론 혼잣말로 연습해보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흐뭇하고 힘이 나던지.언제든 '을'이 먼저 그만둘 수 있다는 사실이 위안이 됐다.내가 지금까지 광고 일을 할 수 있었던 뒷심은 바로 그 날 그 순간의 통쾌함 때문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