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러 대신 엔화 결제.계약기간 축소 요구
"물량확보만 해도 다행" 국내 조선사 한숨

일본 철강업체들이 국내 조선업체에 선박건조용 후판(厚板)을 판매하면서 예전보다 까다로운 조건을 붙이고 있다.후판 품귀현상으로 공급자 우위의 시장이 형성되자 약세인 달러화 대신 강세인 엔화로 결제해 달라고 요구하는 곳이 많아졌고,계약 기간을 대폭 축소하자는 목소리도 높다.후판 가격을 크게 인상한 것은 물론이다.

후판을 구하지 못해 쩔쩔매는 국내 조선업체들은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계약서에 도장을 찍는 분위기다.엔화가치가 오를 경우 원가부담이 늘고 계약을 자주 하면 가격 인상폭이 더 커질 우려가 있지만 뾰족한 대안이 없다.

◆"엔화로 결제해 달라"

일본은 국내 조선업체들의 주요 후판 공급처다.올해 국내 후판 수요량은 1211만t.이중 국내 생산량은 723만t에 그칠 것으로 보여 나머지 488만t은 중국 일본 등에서 수입해야만 한다.수입 물량 가운데 절반가량은 일본에서 들여온다.대략 전체 후판 수요의 20%를 일본에 기대고 있는 셈이다.

대형 조선업체들은 일본산 후판 수입 비중이 더 높다.현대중공업의 경우 올해 필요한 390만t의 후판 가운데 90만t(23%)을 일본에서 들여오고 삼성중공업은 150만t 중 45%가량이 일본산이다.

그동안은 일본 철강업체들과 달러 베이스로 거래를 해 왔기 때문에 엔화의 움직임은 국내 조선업체의 큰 관심거리가 아니었다.그러나 올해부터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다.후판 값을 엔화로 계산해 달라는 요구가 늘어나고 있는 것.

최근 타결된 국내 조선업체들과 일본 철강업체들간 후판 공급 계약에서 신일본제철 고베제강 스미토모금속 등 상당수 일본 철강회사들은 '엔화 결제'를 요구,관철시켰다.엔화 값이 오를 경우 국내 조선업체들의 원가부담이 그만큼 늘어나게 되는 셈이다.메이저 일본 철강회사 중에서는 JFE 정도만 달러 결제를 유지하고 있다.
후판 귀하니… 日 철강社 배짱 영업
◆"일단 6개월만 계약하자"


계약기간도 올해부터는 '연간'에서 '반기'로 축소되는 추세다.지금까지는 JFE만 반기를 고집했지만 올해는 신일본제철 등 대부분의 일본 철강업체들이 국내 조선업체와 반기 베이스(4~9월)로 계약을 맺었다.하반기 이후 후판 가격이 더 뛰면 그때 가서 가격을 더 올리겠다는 복선이 깔려 있다는 관측이다.

후판 협상가격도 대폭 인상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조선업계에 따르면 올 4월 이후 공급될 일본산 조선용 후판가격은 지난해 계약한 수준(t당 650달러선)에 비해 200달러가량 인상된 850달러 선에 타결된 것으로 알려졌다.몇몇 조선업체가 아직 협상을 진행 중이지만 먼저 타결된 업체의 가격이 후발 계약자들의 바로미터가 돼 온 관행을 감안할 때 200달러가량의 인상은 불가피하다는 전망이 우세하다.

◆"물량만 줘도 고마울 뿐"


선박 건조 주문이 밀려들어 후판 수요량이 급증한데다 최근엔 철강제품의 원재료인 철광석과 유연탄 값까지 뛰면서 조선용 후판은 부르는 게 값일 정도로 가격상승 추세가 가파르다.국내 조선업체 입장에서는 어차피 일정량은 해외에서 들여와야 하는 만큼 협상 자세가 일본 철강업체에 비해 상대적으로 수동적일 수밖에 없다.조선업계 관계자는 "하반기 들어 후판가격이 추가로 오르거나 엔화가치가 더 상승할 경우 원가부담이 늘게 되지만 물량 확보가 다급하다 보니 일본 철강업체들의 요구를 대부분 수용하는 분위기"라고 설명했다.


안재석 기자 yag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