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타타자동차가 포드의 재규어와 랜드로버를 인수하기 위한 막바지 작업에 한창이다.

30억달러의 자금 조달이 마무리되면 이번 주 안에 인수 계약이 성사될 전망이다.

지난해 2500달러짜리 초저가차 개발로 주목받았던 타타자동차가 이제는 고급 브랜드 자동차 진영까지 갖춤으로써 글로벌 메이커로 도약하게 된 것이다.

라탄 타타 회장은 앞서 2000년 세계 2위의 영국 차(茶) 업체 테틀리를 사들이며 글로벌 인수ㆍ합병(M&A) 시장의 큰손 자리를 예약했다.

2004년에는 5건,2005년에는 10건,2006년에는 무려 20건의 M&A를 성사시켰다.

신흥국(이머징마켓)의 다국적기업들이 세계 무대로 행진하고 있다.글로벌 M&A 시장을 주도하며 몸집을 불리고 혁신적인 기술로 선진국 시장도 주름잡는다.개도국 기업 하면 방탕한 독재자의 둥지나 세습 경영 정도를 떠올리던 서구 기업들도 시각을 고칠 수밖에 없게 됐다.불과 10년 전만 해도 포천이 선정한 글로벌 500대 기업 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개도국 업체는 20여개에 그쳤지만 이제는 70개로 불어났다.지난해 새로 이름을 올린 신흥국 기업만 9개에 달했다.

세계적인 컨설팅업체인 액센츄어는 최근 발간한 글로벌 보고서 '다극화 시대-이머징마켓 다국적기업의 부상'에서 신흥국 다국적기업,즉 'EMM(Emerging Market Multinationals)' 시대가 왔음을 선언했다.김희집 액센츄어코리아 총괄 대표는 "이제까지는 이머징 국가의 고성장에 관심을 기울여왔지만 이제는 그 성장을 이끌고 있는 주인공인 개별 기업들이 화두가 됐다"며 "EMM의 시각으로 다극화 시대를 이해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놀라운 성장 속도…M&A의 큰손으로

액센츄어가 EMM을 집중 조명하게 된 계기는 놀라운 성장 속도에 있다.2005년 이후 선진국 다국적기업의 매출과 고용이 10% 성장에 머무는 동안 100대 EMM의 매출과 고용은 각각 48%,73% 급증했다.뉴스위크는 지난해 10월 이머징마켓 100대 기업의 총수입이 2005년 기준으로 미국 기업보다 10배,일본 기업보다 24배,독일보다는 34배 늘었다고 밝혔다.

EMM은 최근 M&A를 통해 세계 시장에서 거침없이 질주하고 있다.업계 59위에 그쳤던 타타스틸은 영국과 네덜란드의 합작 철강회사 코러스그룹을 122억달러에 인수,세계 5위 철강업체로 올라섰다.세계 1위 자리도 유럽의 아르셀로를 320억달러에 사들인 인도의 미탈스틸이 차지하고 있다.브라질 광산업체인 발레(CVRD)는 캐나다 인코사를 127억달러에 인수하며 세계 2위 광산업체로 부상했다.최근에는 스위스 최대 자원회사인 엑스트라타를 900억달러에 사들이겠다고 나선 상태다.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부실에서 비롯된 세계적 신용경색은 이머징마켓 기업들에는 또 다른 기회다.세계적인 투자전문가인 앙트완 반 아그마엘 이머징마켓 매니지먼트 회장은 "신용경색으로 서구 다국적기업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가운데 개도국의 대기업들이 세계 경제를 이끄는 힘의 원천이 되고 있다"고 평가했다.시장조사업체인 딜로직에 따르면 지난해 신흥국 자본이 주도한 M&A는 총 1280억달러(1~10월 기준)로 2003년 140억달러보다 10배 가까이 늘었다.

◆순발력ㆍ유연성ㆍ현지화가 성장동력

액센츄어는 즉각적이고 공격적인 성장 전략을 EMM의 강점으로 꼽는다.2006년 한 해 브릭스(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경제권에서 흘러나온 해외직접투자 자금 중 98%가 또 다른 이머징마켓으로 흘러들어갔다.중국은 자원산업부터 금융 서비스산업에 이르기까지 아프리카에 대규모 자금을 퍼붓고 있다.중국 공상은행(ICBC)은 남아프리카 주요 은행인 스탠더드뱅크의 지분 20%를 갖고 있고 네트워크 장비업체인 화웨이도 선진 시장이 아닌 남아프리카와 남미,동유럽 등에 우선 투자한다는 전략을 세웠다.현대자동차 삼성 LG 등 한국 기업들의 성장동력도 적극적인 해외투자다.지난해까지 베트남 투자 1위 국가는 미국도 일본도 아닌 한국이었다.이처럼 선진 시장을 먼저 공략하기보다는 이웃의 또 다른 이머징마켓을 개척하는 방식으로 성장 속도를 높이는 것이 EMM의 전략 중 하나다.

EMM의 적극적인 수요 창출 능력도 서구기업과 경쟁하는 힘이다.비결은 고객의 눈높이에 맞춘 마케팅에 집중하는 것.멕시코의 시멘트업체인 세멕스는 직원들을 빈민가 고객들과 하루 10시간씩 1년간 보내도록 하며 소비자 파악에 주력했다.자사 제품을 구매할 수 없는 저소득층을 위해 복권을 발행,당첨된 사람들에게 건축자재를 제공하는 마케팅도 이때 탄생했다.삼성은 인도에서 전통 의상인 사리를 세탁할 수 있는 특수 기능을 세탁기에 채용해 히트했다.중국 PC업체인 레노버는 중국을 18개 영업지역으로 나누고 이를 다시 108개 조각으로 분류ㆍ분석하는 등 시장 세분화에 심혈을 기울인다.박정택 액센츄어 상무는 "EMM의 경쟁력은 기업 조직이 커졌는데도 작은 조직에서 갖고 있던 통찰력과 현지 관리에 대한 집중 전략을 잃지 않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지배구조의 특수성도 EMM의 성장 과정에서 강점으로 작용해왔다.포천 500대 기업에 속한 70개 EMM 중 20%는 국영기업이다.말레이시아의 페트로나스,브라질의 페트로브라스,멕시코 페멕스 등이 대표적이다.국영기업은 투자자의 간섭과 압력이 덜해 서구 기업보다 자율성과 유연성 측면에서 유리하다.다양한 산업군을 포괄한 재벌 형태도 다수를 이룬다.한국의 CJ SK뿐만 아니라 인도의 릴라이언스그룹과 타타그룹,이집트의 오라스콤 등은 국내 시장과 글로벌 시장의 집중 영역을 차별화함으로써 성장동력을 극대화하고 있다.

◆글로벌 브랜드 구축이 과제

EMM의 과제는 빠른 외형 성장에 걸맞은 내실을 갖추는 것이다.아시아 EMM 가운데 파이낸셜타임스(FT) 선정 '세계 100대 글로벌 브랜드'에 등재된 브랜드는 한국의 삼성과 현대자동차 LG 등 3개에 불과하다.이를 만회하기 위해 EMM은 연구개발(R&D) 투자에 미래를 걸고 있다.세계의 공장으로 불리는 중국과 인도의 R&D 투자는 2006년 전년 대비 30% 성장했다.타타자동차는 1400명의 전문인력으로 구성된 엔지니어링 리서치센터를 인도 푼 지역에 설립한 데 이어 영국 워릭 지역에도 기술센터를 구축했다.

액센츄어 조사 결과 EMM 경영진들은 성장의 가장 큰 장애물로 인재 부족을 꼽았다.이 밖에 △후발 EMM 기업과의 경쟁 △현지화 마인드 유지 △거세지는 국가별 보호주의에 대한 대응 등도 EMM의 당면 과제로 지적된다.김 대표는 "'생각은 세계적으로,행동은 현지에 맞게'라는 슬로건은 EMM이 끝까지 버리지 말아야 할 정신"이라며 "한국이 세계적인 선진국에 진입하려면 EMM이 10개 이상은 더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

김유미 기자 warmfron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