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있는 한 지방검찰청의 여검사는 자신의 자가용인 BMW를 몰고 출퇴근한다.

그녀는 6년차인 평검사다.

연차가 얼마 되지 않은 검사가 외제 차를 끌고 다니는 것은 예전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지금도 남자 법조인 세계에선 큰 변화가 없다.

대검찰청의 한 남자 부장검사는 "부장이나 차장검사도 쏘나타가 보통"이라며 "어떤 차량을 타고 다녀야 한다는 룰은 없어도 검사장들이 주로 이용하는 그랜저급 이상은 눈치가 보여서 부담스럽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하지만 법조계에 여풍(女風)이 거세지면서 종래 관행이 여지없이 깨지고 있다.

수도권에 있는 법원의 김모 부장판사는 최근 육아 및 요리에 관한 '특별 과외'를 아내로부터 받고 있다.

법원에 인사가 나면서 재판부의 배석 판사 2명이 모두 여성 판사로 배치됐기 때문.김 부장판사는 "아내한테 여러 가지 물어보고 거기서 들은 걸 가지고 여성 배석판사들과 얘기하다 보니 공통의 관심사가 생겨 좋다"며 "드라마 볼 때도 남자주인공 위주로 보게 돼 아내로부터 '아줌마 다 됐다'는 소리까지 듣는다"고 얼굴을 붉혔다.

지난달 새로 임용된 여검사는 41명.전체 82명 중 재임용한 검사 5명을 빼고 나면 새로 임관한 사법연수원 37기 수료생 77명의 54%를 차지한다.

또 2008년 3월 현재 전국 법원의 여성 판사 수는 총 496명으로 전체 2307명 중 21.5%다.

이는 2004년의 275명(13.1%)에 비해 두 배 가까이 늘어난 수치다.

이 같은 여성 법조인 수의 증가가 자연스럽게 법조계 문화를 바꾸고 있는 것이다.

서울중앙지법의 한 판사는 "수도권 지역 연수원 동기 모임을 할 때면 여성 판사들이 과반수가 넘어 패밀리 레스토랑 같은 곳에 가서 밥만 먹고 헤어지는 경우가 많다"며 "삼겹살에 소주가 그리운 남자 동기들끼리 따로 '남(男) 판사회'를 만들어 모일 때도 있다"고 말했다.

전형적인 남성 위주였던 법관 사회에 여성들이 늘어나면서 '사내연애' 장면도 자주 목격된다.

서울중앙지법의 한 부장판사는 "작년과 재작년에 함께 있었던 배석판사들이 조만간 결혼하게 된다"며 "판사들끼리 커플이 되는 것도 알게 모르게 많아졌다"고 전했다.

여판사가 흔치 않던 시절 임관했던 여성 부장판사들은 이런 변화를 온 몸으로 느끼고 있다.

수도권에 있는 법원의 한 여성 부장판사는 "초임 시절에는 여자 화장실조차 없어 남자 화장실의 한 칸을 여자 화장실로 썼던 적도 있다"며 "세면대에서 법원장님도 만나고 부장님도 만나는 등 민망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강력 사건과 흉악 범죄 사건이 많아 전통적으로 여성 법관들이 적었던 형사 재판부에도 많은 여성 판사들이 배치되기 시작했다.

서울중앙지법은 올해 형사부에 이림 부장판사를 비롯해 총 12명의 여성 판사를 배치했다.

지난해 부장판사 없이 2명의 여성 판사(예비 판사 제외)가 형사부에서 재판을 진행했던 것에서 크게 늘어난 규모다.

검찰의 변화도 눈에 띈다.

대검찰청의 한 검사는 "언젠가 퇴임한 선배 검사가 밥을 산다고 해서 과에서 단체로 회식한 일이 있는데 여검사가 노골적으로 반감을 표시하며 왜 그런 밥을 얻어 먹느냐고 엄청 싫어하더라"며 "법조계 분위기가 맑아질 것 같다"고 말했다.

여성 법조인들은 아직도 갈 길이 멀다고 말한다.

부장판사만 60명이 넘는 서울중앙지법에 여성 부장판사는 형사부의 이림,민사부의 김영혜 부장판사 등 2명뿐이다.

물론 여성 법조인 증가가 긍정적인 방향으로만 작용하는 것은 아니라는 지적도 있다.

"인지 수사가 쉽지 않다"거나 "회식하다 이상한 얘기만 나와도 자리를 박차고 나가 팀워크가 우려될 때도 있다"는 등의 목소리들이 그것.하지만 '알파 걸'들에게 법조계도 더 이상 예외가 될 수 없다는 데는 이들도 이견이 없는 듯하다.

박민제 기자 pmj53@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