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에서 원자재 수입업을 하는 K사장은 최근 동종업계에서 친하게 지내는 동료 사장들과 1인당 20억원씩 100억원을 모았다.

K사장은 이 돈으로 평소에 눈여겨 보고 있던 중견 제조업체 한 곳을 인수할 생각이다.

"미국발 악재로 주식시장도 긴 겨울잠에 빠져있고,부동산시장도 다시 활성화되려면 시간이 걸릴 듯해서 아예 기업을 인수할 생각을 하게 된거죠.은행금리보다 높은 연 8% 안팎의 배당을 꾸준히 받을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자금이 필요한 견실한 업체에 도움을 줄 수 있게 된 것도 기쁜 일이죠."

아직 활성화 돼 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K사장처럼 거액 자산가들 가운데 사모펀드를 결성해 직접 기업 인수에 나서는 사람들이 요즘 들어 서서히 늘어나는 분위기다.

개인에 의한 이 같은 기업 인수.합병(M&A)은 재테크 환경이 급속도로 악화된 요즘 부자들에게 일종의 '돌파구'처럼 여겨지고 있다.

그렇다면 중견기업 인수를 원하는 개인 투자자들은 어떤 방식으로 이 같은 펀드 결성에 나서고 있을까.

국내에서는 아직 사모펀드 투자가 활성화돼 있지 않다 보니 아직까지 펀드를 결성할 주체들이 많지 않다.

대형 자산운용사들은 기관의 물량만을 운용하는 것으로도 벅차기 때문에 30억~50억원 규모의 사모펀드는 잘 모집하려 하지 않는다.

펀드도 규모가 클수록 수익률이 좋아지는 일종의 '규모의 경제'가 작용하기 때문에 수십억원에서 수백억원대 규모로는 수지가 맞지 않는다는 것.대신 소규모 자산운용사들이 대형 자산운용사들이 건드리지 않는 일종의 틈새시장을 노리고 사모펀드에 대한 마케팅을 강화하고 있다.

사모펀드가 결성되기 위해서는 뜻이 맞는 투자자들이 모여야 하는데,구심점 역할을 하는 곳이 은행.증권사의 PB센터와 재무 컨설팅 업체 등이다.

특히 믿을 수 있는 은행을 중심으로 PB영업이 활성화되면서 사모펀드를 통한 M&A도 점점 활성화되는 추세다.

은행이 먼저 설명회를 하고 고객들을 유치하는 경우가 많지만,K사장의 예처럼 부자들끼리 동호회처럼 결성된 투자모임 등에서 먼저 적당한 매물을 찾아달라고 요청해오기도 한다.

사모펀드는 대외적으로 홍보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투자 여력을 갖춘 인적 네트워크가 있어야 투자가 가능하다.

특히 소수의 마음이 맞는 투자자들끼리 최근 트렌드를 반영해 투자를 빠르게 결정.집행하기 때문에 덩치가 작은 사모펀드가 의사결정 과정을 신속하게 가져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다만 부동산이라든가,미술품 같은 특별자산에 투자하는 사모펀드와 달리 기업 M&A를 위해 결성되는 펀드들의 경우 활성화되기까지 넘어야 할 벽이 많은 것 또한 사실이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2000년을 전후해 있었던 벤처투자 전성기 때에 인기를 끌었던 벤처기업에 대한 엔젤투자와 달리 요즘은 부자들이 수익성이 어느 정도 검증된,견실한 중견 제조업체를 찾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부자들의 이런 '입맛'에 맞는 매물이 시장에 잘 안 나온다.

우리나라의 중견업체 오너들이 지분투자를 받는 것을 극도로 꺼려하는 것도 부자들에 의한 M&A를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다.

무엇보다 사람을 다루는 데서 오는 어려움이 크다.

국내 한 대기업 임원으로 있으면서 최근 재테크 차원에서 수억원의 돈으로 해외 명품 수입업체를 인수한 L씨가 이런 사례다.

L씨의 경우 인수한 회사의 영업이 예상외로 잘 돼 인수한 지 2년 만에 손익분기점을 지나 지금은 이익규모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상황이 이처럼 괜찮은데도 L씨는 요즘 이 회사에 대한 투자를 계속해야할지를 놓고 고민에 빠져 있다.

"외국계 증권회사 임원 출신 여성 사장을 영입해서 경영을 맡기고 있어요.

그런데 이 사람이 실력은 출중한데 시도 때도 없이 연락이 와 30분에서 1시간씩 경영상의 애로를 토로하는 겁니다.

이런 일이 매일 같이 지속되니까 일상 업무가 지장을 받을 지경이에요.

지금까지는 '모든 것은 사장님이 알아서 하시라'며 모른 척 하고 있었는데,계속 이런 식으로 수수방관하고 있을 수도 없고…'차라리 투자금을 회수해 부동산 투자나 할까'하는 생각도 많이 하고 있지만,회사 직원들에게 못할 짓 같아서 마음을 고쳐 먹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어려움 때문에 중견업체에 대한 정보 데이터베이스(DB)를 많이 갖고 있는 기업.산업은행 등 국책은행과 우리.외환은행 등 시중은행들이 이 같은 DB를 활용해 PB영업을 활성화한다는 전략을 세워두고 있지만,이 같은 현실적인 벽 때문에 실제로 영업이 활성화되지는 않고 있다.

하지만 지금과 같이 마땅한 투자처가 없는 상황이 오랜 기간 지속되고,국내 투자자들이나 기업인들의 마인드가 변한다면 사모투자가 갖고 있는 여러 가지 장점들을 감안할 때 조만간 개인에 의한 기업 M&A 시장이 활성화될 가능성이 높다.

/김재한 국민은행 평촌PB센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