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적인 미의 세계, 故조마리아 3회 작품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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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마리아 "생을 한가운데서 생을 불사른 화가"
우리나라 역대 최고화가로 평가 받고 있는 김종하 화백(91)의 부인 (故)조마리아 유작전이 3월 15일부터 포털아트(www.porart.com) 2층 전시실에서 열린다.
그녀는 김종하 화백과 유럽에서 생활하면서 유럽 각국의 종교 미술을 철저하게 연구하고 분석해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구축했다.
그녀의 작품은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특이한 기법으로 파리에서도 많은 사람들에게 감탄을 유발케 했다. 파리소재 화랑가에서도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훌륭하다! 이 작품은 세상에 없는 오리지널 작품이다" 라며 박수를 보냈다. 그녀의 화법의 특징은 기도하며 그 기도에서 얻은 영감으로 그리는 것이다.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테마의 기법이기 때문에 호기심이 자극된다.
그녀가 창작한 작품수는 1200여점이나 된다. 이중 칼라 펜화는 100여점이다. 하지만, 신기한 것은 한 장도 버리는 작품이 없었다는 것이다. 보통사람들은 잘 안되거나 만족하지 못하면 구겨 버린다. 그러나 그녀는 한 장도 버리거나 뭉개 버리는 일이 없었다고 김종화 화백은 설명한다.
이번 전시회에 대한 김종화 화백의 부쳐…
전형적인 한국여성으로 조용한 성품의 풀잎 같은 모습의 여인. 어려운 역경을 살아오면서 어린 시절부터 시 또는 산문 등을 쓰며 일기장을 시커멓게 물들였던 여인, 그녀. 그녀가 바로 내 아내이다. 하루 일과를 펜화로 마무리하였기 때문에 일기장은 흑백사진 같은 그림으로 메워졌다.
내 아내 조마리아는 어려서 부모님을 여의고 조부모님들과 소녀시절을 외롭게 보내야 했었다. 초등학교를 마칠 무렵에는 대가족들과 생활하며 모든 집안일을 도맡아 처리하는 영특함을 보였다. 그러면서 의학공부를 시작하였고 국립병원에서 활동하였다. 그러던 중에 27세가 되어서야 나 김종하를 중매로 만나 가정을 이루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늦은 결혼 생활의 단맛을 맛보기도 전에 결혼 3일 만에 알 수 없는 증상으로 대학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나의 보살핌으로 1개월 만에 퇴원은 하였지만 후유증으로 3년간을 더 투병하여야만 했다. 그때 나는 정말 극진하게 그녀를 보살폈다.
그 후 그녀는 그녀가 결혼할 때 주례를 맡아 주셨던 목사님과의 약속을 계기로 교회에 나가게 되었고 하나님과 소통하여 열심히 기도를 했다. 그 덕택이었다. 그녀는 3년 후 완쾌 되었다.
그 일로 인해 그녀는 하느님의 딸이 되었고 하느님의 품속에서 평생을 살게 된다. 나 김종하는 그녀가 완쾌하자 곧바로 불란서 유학을 준비하였다. 그 당시로서는 어려운 시절이었던 만큼 불란서 유학은 모험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남편인 나의 그림 열정을 거스르지 않았다. 유학 3년 후 내가 귀국을 하게 되자 우리 둘의 생활은 기쁨에 차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제야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됨으로써 건강은 회복되었고, 그녀는 타고난 예술적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그녀는 나의 배려로 첼로를 배워가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그녀는 1980년에 나를 따라 불란서 파리로 가게 되었고, 우리 둘은 파리에 자리 잡고 유럽 각국을 여행하며 본격적으로 그림을 연구하며 공부하였다. 3년간을 쉬는 날도 없이 파리를 중심으로 유럽 각국의 종교 미술? ?철저하게 연구하고 분석 했다. 그녀의 작품은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특이한 기법으로 파리에서도 많은 사람들에게 감탄을 유발케 했다. 파리소재 화랑가에서도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훌륭하다! 이 작품은 세상에 없는 오리지널 작품이다" 라며 박수를 보냈다. 그녀의 화법의 특징은 기도하며 그 기도에서 얻은 영감으로 그리는 것이다.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테마의 기법이기 때문에 호기심이 자극된다. 어느덧 그녀가 그린 그림의 수는 1200여점이나 되었고 신기한 것은 한 장도 버리는 작품이 없었다는 것이다. 보통사람들은 잘 안되거나 만족하지 못하면 구겨 버린다. 그러나 그녀는 한 장도 버리거나 뭉개 버리는 일이 없다. 붓대를 들면 몇 시간씩 지속적으로 온종일 며칠이고 만족할 때까지 완성시킨다. 붓대를 들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너무나 진지하고 온화해서 아름다웠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고혈압으로 쓰러지면서 오랜 투병생활이 시작됐다. 수족이 마비되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첼로를 연주하며 성가를 부르는 일, 그림을 그리는 일 모두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나는 온 힘을 다해 지극정성으로 내 아내를 보살폈다. 그 힘일까? 그녀가 왼손을 쓰게 되면서 식사는 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이것만으로 만족할 수가 없었다. 첼로 연주는 포기 했지만 그림을 포기하게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왼손의 신경을 살려 다시 그녀의 손에 펜을 들려주었다. 전시회를 기획하고 그녀에게 삶의 생명력을 부여하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펜을 든 지 사흘 만에 오른손으로 그릴 때보다 더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 냈다. 너무나 신기하고 꿈만 같은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이것은 기도의 힘이요, 하느님의 능력이 아니고 무엇일까?
그 후 2000년에 명동 천주교 대성당이 있는 평화 화랑에서 첫 번째 작품전이 열렸고, 2003년에 두 번째 작품전이 또다시 열렸다. 제2회 작품전은 특수한 재료로 그린 아름다운 작품들이었다. 작품은 점점 선명해 가고 건강은 점점 쇠약해 갔다. 그런 힘든 상황 속에서도 작업은 계속 되었다. 이 작품들이 2008년 포털아트 전시에 소개되는 것이다. 내 아내가 하느님의 품으로 간 지 2주년, 그곳에서 그녀는 자신의 3번째 전시회를 보고 있을 것이다.
작업이 계속 이어지던 어느 날이었다. 봉성체(거동이 불편한 성도가정을 방문하여 미사를 보는 것)때 신부, 수녀와 교우자매들 7,8명이 와서 미사를 본 후 뱉은 신부님의 놀라운 말 한마디는 충격이었다. 그 일 때문에 화가 조마리아는 졸도 직전에 이르렀고 맥 빠진 사람처럼 실신하고 말았다. 편한 자리에 위치시키고 위로를 하고 기도를 했다. 그날부터 그녀는 그림 그리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말도 하지 않고 식사조차 소홀이 하며 몇 개월을 지냈다. 그리고 추운 어느 겨울날, 누운 채로 눈을 감고 중얼중얼 기도를 하던 내 아내, 그러나 그녀는 다시는 눈을 뜨지 않았다.
‘신부에게 무슨 말을 들었기에 그랬느냐.’라는 물음이 있을 때마다 아내는 말문이 막히고 눈물만 흐른다고 했다. 나는 지금도 그녀가 받았을 그 충격과 그 순간을 생각하면 너무나 괴롭다.
나는 내 아내 조마리아를 위해 유일한 생활공간이며 작업장인 그녀의 방을 아름답게 꾸미는 일에 정성을 다 하였다. 몸이 자유롭지 못하니 마음이라도 즐겁고 행복하라고, 벽 사면을 성화와 조각으로 장식하여 변화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곤 하였다. 장식물들은 나와 내 아내가 유럽 각지를 여행할 때 수집한 추억이 담겨있는 귀중한 물건들이었다. 누구든지 보면 아름답다는 찬사를 보내왔다. 그녀도 그 공간에서 지루함을 모르고 그림을 그리곤 했다. 기도하며 주님께 감사하며 열 시간, 그 이상도 피곤한 줄 모르고 붓대를 놓을지 몰랐다. 이러한 일과가 그녀의 유일한 생활이었다. 바로 그날 봉성체날 동참했던 신부님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녀에게는 생명줄 같았던 신앙심을 송두리째 뽑아버렸다.
의자에 앉아있던 신부님이 갑자기 일어섰다. 손가락으로 벽면을 가리키며 성난 사람처럼 말했다.
"이것이 다 뭡니까? 이것들이 천국 갑니까? 지옥 갑니다. 다 치워 버리세요."
그 말 한마디에 몸도 성치 않은 그녀의 생명을 지탱해주던 유일한 믿음은 그렇게 허무와 혼란으로 산산 조각이 나버렸다. 이제 신앙심도 다 빼앗기고 의지할 것 하나 없는 빈껍데기만 남았고 모든 것을 잃었다. 그때 그녀는 제3회 전시 준비 중이었으나 모든 것이 엉망이 되고 말았다. 그녀가 그렇게 떠난 지 이제 2주년이 흘렀다. 이제야 포털아트에서 그녀의 마지막 소망이었던 제 3회 전시가 열려 만인에게 그녀의 작품을 볼수 있게됐다.
[한경닷컴]
우리나라 역대 최고화가로 평가 받고 있는 김종하 화백(91)의 부인 (故)조마리아 유작전이 3월 15일부터 포털아트(www.porart.com) 2층 전시실에서 열린다.
그녀는 김종하 화백과 유럽에서 생활하면서 유럽 각국의 종교 미술을 철저하게 연구하고 분석해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구축했다.
그녀의 작품은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특이한 기법으로 파리에서도 많은 사람들에게 감탄을 유발케 했다. 파리소재 화랑가에서도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훌륭하다! 이 작품은 세상에 없는 오리지널 작품이다" 라며 박수를 보냈다. 그녀의 화법의 특징은 기도하며 그 기도에서 얻은 영감으로 그리는 것이다.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테마의 기법이기 때문에 호기심이 자극된다.
그녀가 창작한 작품수는 1200여점이나 된다. 이중 칼라 펜화는 100여점이다. 하지만, 신기한 것은 한 장도 버리는 작품이 없었다는 것이다. 보통사람들은 잘 안되거나 만족하지 못하면 구겨 버린다. 그러나 그녀는 한 장도 버리거나 뭉개 버리는 일이 없었다고 김종화 화백은 설명한다.
이번 전시회에 대한 김종화 화백의 부쳐…
전형적인 한국여성으로 조용한 성품의 풀잎 같은 모습의 여인. 어려운 역경을 살아오면서 어린 시절부터 시 또는 산문 등을 쓰며 일기장을 시커멓게 물들였던 여인, 그녀. 그녀가 바로 내 아내이다. 하루 일과를 펜화로 마무리하였기 때문에 일기장은 흑백사진 같은 그림으로 메워졌다.
내 아내 조마리아는 어려서 부모님을 여의고 조부모님들과 소녀시절을 외롭게 보내야 했었다. 초등학교를 마칠 무렵에는 대가족들과 생활하며 모든 집안일을 도맡아 처리하는 영특함을 보였다. 그러면서 의학공부를 시작하였고 국립병원에서 활동하였다. 그러던 중에 27세가 되어서야 나 김종하를 중매로 만나 가정을 이루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늦은 결혼 생활의 단맛을 맛보기도 전에 결혼 3일 만에 알 수 없는 증상으로 대학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나의 보살핌으로 1개월 만에 퇴원은 하였지만 후유증으로 3년간을 더 투병하여야만 했다. 그때 나는 정말 극진하게 그녀를 보살폈다.
그 후 그녀는 그녀가 결혼할 때 주례를 맡아 주셨던 목사님과의 약속을 계기로 교회에 나가게 되었고 하나님과 소통하여 열심히 기도를 했다. 그 덕택이었다. 그녀는 3년 후 완쾌 되었다.
그 일로 인해 그녀는 하느님의 딸이 되었고 하느님의 품속에서 평생을 살게 된다. 나 김종하는 그녀가 완쾌하자 곧바로 불란서 유학을 준비하였다. 그 당시로서는 어려운 시절이었던 만큼 불란서 유학은 모험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남편인 나의 그림 열정을 거스르지 않았다. 유학 3년 후 내가 귀국을 하게 되자 우리 둘의 생활은 기쁨에 차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제야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됨으로써 건강은 회복되었고, 그녀는 타고난 예술적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그녀는 나의 배려로 첼로를 배워가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그녀는 1980년에 나를 따라 불란서 파리로 가게 되었고, 우리 둘은 파리에 자리 잡고 유럽 각국을 여행하며 본격적으로 그림을 연구하며 공부하였다. 3년간을 쉬는 날도 없이 파리를 중심으로 유럽 각국의 종교 미술? ?철저하게 연구하고 분석 했다. 그녀의 작품은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특이한 기법으로 파리에서도 많은 사람들에게 감탄을 유발케 했다. 파리소재 화랑가에서도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훌륭하다! 이 작품은 세상에 없는 오리지널 작품이다" 라며 박수를 보냈다. 그녀의 화법의 특징은 기도하며 그 기도에서 얻은 영감으로 그리는 것이다.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테마의 기법이기 때문에 호기심이 자극된다. 어느덧 그녀가 그린 그림의 수는 1200여점이나 되었고 신기한 것은 한 장도 버리는 작품이 없었다는 것이다. 보통사람들은 잘 안되거나 만족하지 못하면 구겨 버린다. 그러나 그녀는 한 장도 버리거나 뭉개 버리는 일이 없다. 붓대를 들면 몇 시간씩 지속적으로 온종일 며칠이고 만족할 때까지 완성시킨다. 붓대를 들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너무나 진지하고 온화해서 아름다웠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고혈압으로 쓰러지면서 오랜 투병생활이 시작됐다. 수족이 마비되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첼로를 연주하며 성가를 부르는 일, 그림을 그리는 일 모두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나는 온 힘을 다해 지극정성으로 내 아내를 보살폈다. 그 힘일까? 그녀가 왼손을 쓰게 되면서 식사는 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이것만으로 만족할 수가 없었다. 첼로 연주는 포기 했지만 그림을 포기하게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왼손의 신경을 살려 다시 그녀의 손에 펜을 들려주었다. 전시회를 기획하고 그녀에게 삶의 생명력을 부여하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펜을 든 지 사흘 만에 오른손으로 그릴 때보다 더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 냈다. 너무나 신기하고 꿈만 같은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이것은 기도의 힘이요, 하느님의 능력이 아니고 무엇일까?
그 후 2000년에 명동 천주교 대성당이 있는 평화 화랑에서 첫 번째 작품전이 열렸고, 2003년에 두 번째 작품전이 또다시 열렸다. 제2회 작품전은 특수한 재료로 그린 아름다운 작품들이었다. 작품은 점점 선명해 가고 건강은 점점 쇠약해 갔다. 그런 힘든 상황 속에서도 작업은 계속 되었다. 이 작품들이 2008년 포털아트 전시에 소개되는 것이다. 내 아내가 하느님의 품으로 간 지 2주년, 그곳에서 그녀는 자신의 3번째 전시회를 보고 있을 것이다.
작업이 계속 이어지던 어느 날이었다. 봉성체(거동이 불편한 성도가정을 방문하여 미사를 보는 것)때 신부, 수녀와 교우자매들 7,8명이 와서 미사를 본 후 뱉은 신부님의 놀라운 말 한마디는 충격이었다. 그 일 때문에 화가 조마리아는 졸도 직전에 이르렀고 맥 빠진 사람처럼 실신하고 말았다. 편한 자리에 위치시키고 위로를 하고 기도를 했다. 그날부터 그녀는 그림 그리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말도 하지 않고 식사조차 소홀이 하며 몇 개월을 지냈다. 그리고 추운 어느 겨울날, 누운 채로 눈을 감고 중얼중얼 기도를 하던 내 아내, 그러나 그녀는 다시는 눈을 뜨지 않았다.
‘신부에게 무슨 말을 들었기에 그랬느냐.’라는 물음이 있을 때마다 아내는 말문이 막히고 눈물만 흐른다고 했다. 나는 지금도 그녀가 받았을 그 충격과 그 순간을 생각하면 너무나 괴롭다.
나는 내 아내 조마리아를 위해 유일한 생활공간이며 작업장인 그녀의 방을 아름답게 꾸미는 일에 정성을 다 하였다. 몸이 자유롭지 못하니 마음이라도 즐겁고 행복하라고, 벽 사면을 성화와 조각으로 장식하여 변화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곤 하였다. 장식물들은 나와 내 아내가 유럽 각지를 여행할 때 수집한 추억이 담겨있는 귀중한 물건들이었다. 누구든지 보면 아름답다는 찬사를 보내왔다. 그녀도 그 공간에서 지루함을 모르고 그림을 그리곤 했다. 기도하며 주님께 감사하며 열 시간, 그 이상도 피곤한 줄 모르고 붓대를 놓을지 몰랐다. 이러한 일과가 그녀의 유일한 생활이었다. 바로 그날 봉성체날 동참했던 신부님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녀에게는 생명줄 같았던 신앙심을 송두리째 뽑아버렸다.
의자에 앉아있던 신부님이 갑자기 일어섰다. 손가락으로 벽면을 가리키며 성난 사람처럼 말했다.
"이것이 다 뭡니까? 이것들이 천국 갑니까? 지옥 갑니다. 다 치워 버리세요."
그 말 한마디에 몸도 성치 않은 그녀의 생명을 지탱해주던 유일한 믿음은 그렇게 허무와 혼란으로 산산 조각이 나버렸다. 이제 신앙심도 다 빼앗기고 의지할 것 하나 없는 빈껍데기만 남았고 모든 것을 잃었다. 그때 그녀는 제3회 전시 준비 중이었으나 모든 것이 엉망이 되고 말았다. 그녀가 그렇게 떠난 지 이제 2주년이 흘렀다. 이제야 포털아트에서 그녀의 마지막 소망이었던 제 3회 전시가 열려 만인에게 그녀의 작품을 볼수 있게됐다.
[한경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