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avo! My life] 신철 고려대 의대 교수 '여섯 줄 기타가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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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스와 재즈는 인생에 소설 같은 사연이 없는 사람은 하기 힘든 음악이다.
삶의 애환과 깊은 소울(soul)이 녹아들어야 오래된 장맛 같은 소리가 나온다.
그래서 젊은 사람이나 유복하게 살아온 사람은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장르다.
되돌아보면 도무지 어떻게 살아갈지 점칠 수 없었던 한 사나이가 나이 쉰을 넘어 29년 만에 전자기타를 다시 잡고 블루스와 재즈의 세계로 뛰어든 이유는 무엇일까.
국내에서 손꼽히는 코골이 연구 전문가인 신철 고려대 안산병원 호흡기내과 교수(51)는 매일 아침 7시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앰프를 켜고 기타 코드를 꼽는다.
그의 연구실에는 전문가가 아니면 엄두도 내지 못할 블루스 연주용 타일러 기타(500만원 상당)와 1958년식 깁슨 기타(400만원),음질이 가장 뛰어나다는 진공관식 디바이드 13앰프(500만원),기타이펙터 및 프리앰프(400만원) 등이 놓여 있다.
신 교수는 매일 반주음악을 틀어놓고 인터넷 UCC에 올려진 레너드 스키너드,레드 제플린, 올맨브러더스 등 외국 유명 록ㆍ블루스밴드의 연주 실황을 보며 혼자 기타 연습을 한다.
악보없이 즉흥 모방연주가 가능하다는 것은 신 교수가 절대음감을 타고 났음을 입증하는 대목. 그의 연주기량은 동료 음악인으로부터 '필(feel)'이 살아있고 블루스 고유의 '손맛'과 '끈적함'이 일품이라는 평가를 듣고 있다.
"의사가 된 후 다람쥐 쳇바퀴 돌아가듯 환자만 보니까 낙이 없었습니다.그러다 3년전 30년 가까이 가슴에 묻고 지냈던 '기타의 꿈'을 꺼내들었죠.숨가쁘게 살아오느라 미뤄왔는데 막상 기타를 잡으니 뜻밖에도 금방 음감이 되살아났습니다.기타를 치다보면 무아지경에 빠집니다.잡념이 사라지고 진료할 힘도 납니다."
기타는 신 교수의 인생에 큰 의미를 지닌다.
전북 부안에서 3남 3녀의 막내로 태어난 그는 아홉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시련을 겪었다.
어머니는 생계를 꾸리느라,형님과 누나들은 진학공부에 열을 올리느라 그를 방치하다시피 했다.
중학교 때부터 담배를 피웠다.
인천에서 비인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에는 싸움꾼이었다.
기타는 방황하는 소년을 구원해줬다.고2 중반 어깨 넘어 배운 기타솜씨가 일취월장하면서 사고를 치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고3 때부터 이듬해까지는 미8군에서 B급 순회밴드로 연주생활을 했다.
신중현 같은 A급 밴드에 비해 기량은 떨어졌지만 열정을 다해 연주했기 때문에 제법 인기가 있었다.
하지만 고되고 불규칙한 생활 때문이었을까.
신 교수는 폐결핵을 앓아 밴드를 그만둬야 했고 병역도 면제받았다.
집에서 빈둥빈둥 놀아야 했다.
그러던 어느날 신 교수는 의사가 되겠다는 결심을 했다.
간호학을 전공한 셋째누나(신경림 간호협회장)의 영향이었다.
1980년 누나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갔다.
플로리다에서 전문대를 마치고 1983년 고려대 의대에 편입했다.
어렵게 의대를 졸업한 그는 1992년엔 범죄자들이 득실거리는 뉴욕의 브롱크스 레바논 병원에서 혹독한 인턴과 레지던트 과정을 밟았다.
호흡기내과학 노인의학 수면의학 등의 라이선스도 취득했다.
1999년 모교의 교수로 돌아온 그는 지금까지 40여편에 달하는 SCI급 논문을 발표했고 올해 대한수면학회장도 맡았다.
최근엔 코골이 환자를 위한 수면조끼도 개발,시판을 앞두고 있다.
앞만 보고 달려온 인고의 세월, 아련한 그리움으로 그를 지켜준 건 '기타'였다.
이젠 한숨 돌려 마음껏 기타를 칠 수 있기에 행복하다. "밴드를 결성해 가정형편이 어려워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는 어린이를 위해 자선콘서트를 열고 싶습니다.
1시간 정도 '잼(무악보 즉흥연주)'이 가능한 분이면 연락주세요 ." 집 한채와 아이들 교육시킬 재산이면 충분하고 주위 사람들이 잘되는 방향으로 이끄는게 인생의 목표라는 신 교수.굴곡진 인생을 살아왔지만 그의 내면에는 자유와 낭만이 살아있었다.
글=정종호 기자 rumba@hankyung.com
사진=강은구 기자 egkang@hankyung.com
삶의 애환과 깊은 소울(soul)이 녹아들어야 오래된 장맛 같은 소리가 나온다.
그래서 젊은 사람이나 유복하게 살아온 사람은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장르다.
되돌아보면 도무지 어떻게 살아갈지 점칠 수 없었던 한 사나이가 나이 쉰을 넘어 29년 만에 전자기타를 다시 잡고 블루스와 재즈의 세계로 뛰어든 이유는 무엇일까.
국내에서 손꼽히는 코골이 연구 전문가인 신철 고려대 안산병원 호흡기내과 교수(51)는 매일 아침 7시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앰프를 켜고 기타 코드를 꼽는다.
그의 연구실에는 전문가가 아니면 엄두도 내지 못할 블루스 연주용 타일러 기타(500만원 상당)와 1958년식 깁슨 기타(400만원),음질이 가장 뛰어나다는 진공관식 디바이드 13앰프(500만원),기타이펙터 및 프리앰프(400만원) 등이 놓여 있다.
신 교수는 매일 반주음악을 틀어놓고 인터넷 UCC에 올려진 레너드 스키너드,레드 제플린, 올맨브러더스 등 외국 유명 록ㆍ블루스밴드의 연주 실황을 보며 혼자 기타 연습을 한다.
악보없이 즉흥 모방연주가 가능하다는 것은 신 교수가 절대음감을 타고 났음을 입증하는 대목. 그의 연주기량은 동료 음악인으로부터 '필(feel)'이 살아있고 블루스 고유의 '손맛'과 '끈적함'이 일품이라는 평가를 듣고 있다.
"의사가 된 후 다람쥐 쳇바퀴 돌아가듯 환자만 보니까 낙이 없었습니다.그러다 3년전 30년 가까이 가슴에 묻고 지냈던 '기타의 꿈'을 꺼내들었죠.숨가쁘게 살아오느라 미뤄왔는데 막상 기타를 잡으니 뜻밖에도 금방 음감이 되살아났습니다.기타를 치다보면 무아지경에 빠집니다.잡념이 사라지고 진료할 힘도 납니다."
기타는 신 교수의 인생에 큰 의미를 지닌다.
전북 부안에서 3남 3녀의 막내로 태어난 그는 아홉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시련을 겪었다.
어머니는 생계를 꾸리느라,형님과 누나들은 진학공부에 열을 올리느라 그를 방치하다시피 했다.
중학교 때부터 담배를 피웠다.
인천에서 비인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에는 싸움꾼이었다.
기타는 방황하는 소년을 구원해줬다.고2 중반 어깨 넘어 배운 기타솜씨가 일취월장하면서 사고를 치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고3 때부터 이듬해까지는 미8군에서 B급 순회밴드로 연주생활을 했다.
신중현 같은 A급 밴드에 비해 기량은 떨어졌지만 열정을 다해 연주했기 때문에 제법 인기가 있었다.
하지만 고되고 불규칙한 생활 때문이었을까.
신 교수는 폐결핵을 앓아 밴드를 그만둬야 했고 병역도 면제받았다.
집에서 빈둥빈둥 놀아야 했다.
그러던 어느날 신 교수는 의사가 되겠다는 결심을 했다.
간호학을 전공한 셋째누나(신경림 간호협회장)의 영향이었다.
1980년 누나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갔다.
플로리다에서 전문대를 마치고 1983년 고려대 의대에 편입했다.
어렵게 의대를 졸업한 그는 1992년엔 범죄자들이 득실거리는 뉴욕의 브롱크스 레바논 병원에서 혹독한 인턴과 레지던트 과정을 밟았다.
호흡기내과학 노인의학 수면의학 등의 라이선스도 취득했다.
1999년 모교의 교수로 돌아온 그는 지금까지 40여편에 달하는 SCI급 논문을 발표했고 올해 대한수면학회장도 맡았다.
최근엔 코골이 환자를 위한 수면조끼도 개발,시판을 앞두고 있다.
앞만 보고 달려온 인고의 세월, 아련한 그리움으로 그를 지켜준 건 '기타'였다.
이젠 한숨 돌려 마음껏 기타를 칠 수 있기에 행복하다. "밴드를 결성해 가정형편이 어려워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는 어린이를 위해 자선콘서트를 열고 싶습니다.
1시간 정도 '잼(무악보 즉흥연주)'이 가능한 분이면 연락주세요 ." 집 한채와 아이들 교육시킬 재산이면 충분하고 주위 사람들이 잘되는 방향으로 이끄는게 인생의 목표라는 신 교수.굴곡진 인생을 살아왔지만 그의 내면에는 자유와 낭만이 살아있었다.
글=정종호 기자 rumba@hankyung.com
사진=강은구 기자 egk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