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일곱살 때까지 그의 별명은 '방랑자'였다.

맑은 날에는 청명한 바람이 좋아서,흐린 날엔 멜랑콜리한 빗줄기에 홀려서,가장 먼저 눈에 띄는 버스를 타고 무작정 떠나곤 했다.

'늙은 문학청년'의 낭만시절은 아버지의 회갑을 앞두고 막을 내렸다.

"둘째도 벌써 결혼했는데 맏이가 이러고 있으면 어쩌냐"는 타박에 방랑벽을 접었다.

중매결혼으로 가정을 꾸린 뒤에는 6개월 만에 직장을 그만뒀다.

이번엔 방랑벽이 아니라 '문학병' 때문이었다.

한국과학연구원 부설 선박연구소 연구개발실장이라는 직책을 미련 없이 버렸다.

그리고 등단하기까지 4년을 백수로 지냈다.

'착한 아내'는 처가에 말도 못하고 혼자 끙끙 앓았다.

'상과대학 나와 은행 다니던 사람이 글만 써서 어떻게…'

1987년 장편소설 '비명(碑銘)을 찾아서'로 등단할 때의 사연도 드라마틱하다.

당시엔 신춘문예나 문예지를 통하지 않고 단행본으로 데뷔하는 경우가 없었기 때문에 수많은 출판사에서 문전박대를 당했다.

그러다 문학평론가 고(故) 김현의 눈에 띄어 '기적적으로' 발탁됐다.

그의 나이 마흔한살이었다.

200자 원고지 3000장에 달하는 이 작품은 '대체(代替) 역사소설'의 효시라는 극찬을 받았고,영화 '2009 로스트 메모리즈'의 원작이 되기도 했다.

지금까지 펴낸 장편소설ㆍ시집ㆍ사회평론집 등 25권 중에서 가장 많이 팔린 것도 이 작품이다.

누적 판매 부수 10만여부.25년간의 전업작가 경력에 비하면 '소박한 소출'이지만 그는 "10만부가 넘었다"는 대목에 힘을 줬다.

사실 그의 작품은 어렵다.생물학적 지식과 최신 과학논문이 등장하고 형이상학적인 경계까지 마구 넘나든다.

'광팬'들도 "모르겠다"며 전화나 메일로 물어온다.

그런 작품이 스테디셀러가 됐다는 점에서 그는 '행복한 작가'다.

술은 원래 잘 못한다.

저녁 식사를 겸한 인터뷰 자리에서 그가 마신 술은 맥주 한 잔.세 시간 동안 그걸로 '버티는' 모습이 안쓰러운 듯했지만,남들과 어울려 술자리를 '즐기는' 재주 또한 비상하다.

'문지'(문학과지성사) 출신의 동년배 술 친구들이 "복거일 없으면 2차 안 간다"고 할 정도다.

백발 때문에 나이는 들어보이지만 그의 입담이나 몸짓은 여전히 푸르고 젊다.

특별히 운동을 하는 것도 아니다.

'아내 손을 잡고' 동네 근처를 한두 시간 걷는 '부부 산책'이 거의 전부다.

노후 대책? "늙어 죽을 때까지 글 쓰는 노동을 계속할 수 있으니 큰 걱정은 없지요.

원고료가 늘 '쥐꼬리'여서 그렇긴 하지만…."

◎ 약력
△1946년 충남 아산 출생
△1967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졸업
△1969년 기업은행 입행
△1982년 한국과학연구원 부설 선박연구소 연구개발실장
△1987년 소설‘비명(碑銘)을 찾아서’로 등단
△1994년 사회평론집‘진단과 처방’
△1995년 시집‘오장원(五丈原)의 가을’
△1997년 산문집‘소수를 위한 변명’
△2001년 시집‘ 나이들어가는 아내를 위한 자장가’
△2002년 소설‘목성 잠언집’
△2003년 산문집‘영어를 공용어로 삼자’
△2006년 문화미래포럼 대표
△2007년 소설‘그라운드 제로’
△2008년 사회평론집‘경제적 자유의 회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