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길진 칼럼] 돈에 선악은 없어도 과보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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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가족들이 모이면 즐거워야하는 데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 서로 비교하기 때문이다. 돈으로.
한 집안 어른의 생신 잔치가 있었다. 자손들을 모아놓고 이야기 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이 군데군데 섞여 있었다.
“OO는 이번에 큰 아파트로 이사 가더라.”
“돈을 잘 벌어서 나한테 용돈도 두둑이 주더라.”
“이번에 국회의원 나간다더라.”
그런데 이런 말을 들은 일가친척 자손 중에는 아직도 전세를 못 면한 사람도 있었다. 이제 막 걸음마하는 아이를 보육원에 내 맡기고 비정규직 일터에서 내외가 밤늦도록 발이 부르트도록 일해도 오르는 전세 값도 따라잡기 힘든 처지.
또 한집은 서울 외곽에서 작은 농장을 하며 향토연구를 하고 있었다. 수입은 없지만 자부심으로 살고 있었다.
물론 그날 어른은 자손들이 더 분발하라고 덕담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한 집안의 어른의 위치는 무거운 것이다. 의도와 달리 모인 사람을 서로 비교하고 있었다. 게다가 돈과 벼슬의 잣대로 평가하고 만 것이다. 집안 어른이 제시한 기준에 미달한 친척들이 다시 그런 모임에 다시 얼굴을 내밀지는 미지수다. 이런 마음은 한 집안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대로 사회풍토로 이어진다.
일 끝낸 술자리, 동네 아주머니들 찜질방에서 모이면 빠지지 않는 이야기가 있다.
“그 집은 아파트가 세 채래.”
“이번에 외제차로 바꾸었데.
“그 집 자식들 유학 보냈데.”
심지어 오랜만에 모인 동창이나 명절날 일가친척의 대화 끄트머리도 슬그머니 돈 얘기로 흐른다. 시기어린 질투 같지만 한편으로 부러움이 묻어난 희망이기도하다.
탈세, 범죄, 횡령, 투기 등 다시 말해 탈법으로 적발되지만 않는다면 돈은 많을수록 좋다는 게 현대인들의 보편적인 가치관인 듯하다. “아들아! 옆집엔 세탁기 샀다.”하는 카피의 광고가 대박이다. 효도도 돈과 비례한다는 세태가 잘 반영되어있다. 돈이 곧 능력이며 인격이다. 심지어 돈이 신이라고 까지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
변하지 않는 것이 진리라면 변하는 것도 진리다. 태양이 돈다는 시대로 있었고, 양반 상민이 나뉘던 시대도 있었다. 그 당시에는 그것이 진리였고 목숨같이 여겼다. 그러나 매번 옷의 유행이 달라지듯이 인간의 가치관도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이 시대 우리는 돈에 목숨 거는 시대에 살고 있다.
여기에는 중요한 사항이 암시되어있다. 이 시대에 돈이 최고라는 말을 바꿔 말하면 돈이 시대를 초월한 절대불변의 가치는 아니란 것이다. 세상이 변하는 이유는 그 중심에 보이지 않는 본질이 있기 때문이다. 그 본질에 맞게 계절의 옷을 갈아입는 것이다.
그렇다면 본질이란 무엇일까. 본질이란 과보다. 모든 것에는 인과가 있고 그 과보가 따르기 마련이다. 돈도 예외가 아니다. 아무리 돈에 나쁜 돈, 좋은 돈이라고 쓰여 있지는 않지만 분명 돈에도 과보가 있다.
우리가 자주 입에 오르내리는 화제의 인물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거개가 대박부자들이다. 남들보다 더 빨리 많이 번 사람들 이야기다. 거액의 유산을 물려받거나 토지 보상금을 받거나 부동산 투기, 주식 투자 등으로 일시에 거금을 쥔 경우가 많다. 문제는 이런 졸부들이 자기 복(福)으로 착각한 다는 것.
앞 칼럼에서 언급한 바 있지만, 복(福)은 자기 마음가짐으로 쌓은 적금통장이고 운(運)은 대출통장이다. 그럴만한 노력이 없는 자가 일거에 거액을 거머쥐었다는 뜻은 무엇인가. 대출을 받은 것이다. 빚을 얻는 것이다.
거의 대부분 졸부들의 말로는 비참하다. 거액의 복권에 당첨되었어도 행복한 사람은 거의 찾을 수 없다. 운을 제대로 갚지 못했기 때문이다. 운의 대출을 제대로 갚지 못하면 사채보다도 더 무섭다. 가정이 파괴되고 건강을 망치고, 그것도 모자라 자식에까지 고스란히 과보가 미치기 때문이다.
이것이 피가 뚝뚝 흐르는 진짜 현실이다. 언젠가는 돌려줘야하는 대출을 받고 부자인양 착각하고, 주변 사람들은 이를 부러워하며 대박로또의 로망을 꿈꾸다니 기막힌 노릇이 아닐 수 없다.
특히 기업의 상속에 유의해야 한다. 아무리 개인의 회사이고 합법적으로 주권을 상속한 것 같지만, 기본적으로 복은 물려줄 수가 없다. 한 독립적인 영혼이 일군 마음의 복밭이 어찌 대물림 되겠는가. 우주 시스템의 조종을 받는 한 영혼의 업보를 어떻게 부모라고 한들 그 틀을 넘을 수 있겠는가. 결국 자식에게 ‘상속’이란 이름으로 ‘운이라는 대출 빚’을 떠안긴 것에 다름 아니다. 수많은 사원들과 경쟁자들을 희생으로 성장한 기업이라면 그 기업의 재산은 이미 개인의 것이 아니라 사회의 것이다.
‘부자 집안 3대가 못 간다’고 했고 ‘쉽게 들어온 돈 쉽게 나간다’ 했다. 어떤 해박한 경제지식보다도 평범한 이 상식이 오히려 본질에 가깝다. ‘성공해야 행복하다’는 생각, ‘유명해야 성공한 인생’이라는 생각 또한 현대인이 돈 버는 데는 주의해야할 또 다른 함정이다.
땅에 넘어져도 땅을 짚고 일어서야한다. 어차피 돈이 우상인 시대에 살고 있다면 ‘돈은 속물이야’하며 도피할 일이 아니다. 돈을 통해 영혼을 성숙시켜야한다.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댐은 없듯이 불행도 작은 곳에서부터 잉태된 것이다. 가정교육에서 부터 바로잡을 수 있다. 적어도 행복을 위해 돈을 번다면, 집안 식구들이 모였을 때가 좋은 기회다. 집안 어른이 빚 대출로 부자가 되라고 부추길게 아니라 돈에도 인과가 있다는 따끔한 충고를 해 주는 것은 어떨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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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집안 어른의 생신 잔치가 있었다. 자손들을 모아놓고 이야기 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이 군데군데 섞여 있었다.
“OO는 이번에 큰 아파트로 이사 가더라.”
“돈을 잘 벌어서 나한테 용돈도 두둑이 주더라.”
“이번에 국회의원 나간다더라.”
그런데 이런 말을 들은 일가친척 자손 중에는 아직도 전세를 못 면한 사람도 있었다. 이제 막 걸음마하는 아이를 보육원에 내 맡기고 비정규직 일터에서 내외가 밤늦도록 발이 부르트도록 일해도 오르는 전세 값도 따라잡기 힘든 처지.
또 한집은 서울 외곽에서 작은 농장을 하며 향토연구를 하고 있었다. 수입은 없지만 자부심으로 살고 있었다.
물론 그날 어른은 자손들이 더 분발하라고 덕담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한 집안의 어른의 위치는 무거운 것이다. 의도와 달리 모인 사람을 서로 비교하고 있었다. 게다가 돈과 벼슬의 잣대로 평가하고 만 것이다. 집안 어른이 제시한 기준에 미달한 친척들이 다시 그런 모임에 다시 얼굴을 내밀지는 미지수다. 이런 마음은 한 집안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대로 사회풍토로 이어진다.
일 끝낸 술자리, 동네 아주머니들 찜질방에서 모이면 빠지지 않는 이야기가 있다.
“그 집은 아파트가 세 채래.”
“이번에 외제차로 바꾸었데.
“그 집 자식들 유학 보냈데.”
심지어 오랜만에 모인 동창이나 명절날 일가친척의 대화 끄트머리도 슬그머니 돈 얘기로 흐른다. 시기어린 질투 같지만 한편으로 부러움이 묻어난 희망이기도하다.
탈세, 범죄, 횡령, 투기 등 다시 말해 탈법으로 적발되지만 않는다면 돈은 많을수록 좋다는 게 현대인들의 보편적인 가치관인 듯하다. “아들아! 옆집엔 세탁기 샀다.”하는 카피의 광고가 대박이다. 효도도 돈과 비례한다는 세태가 잘 반영되어있다. 돈이 곧 능력이며 인격이다. 심지어 돈이 신이라고 까지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
변하지 않는 것이 진리라면 변하는 것도 진리다. 태양이 돈다는 시대로 있었고, 양반 상민이 나뉘던 시대도 있었다. 그 당시에는 그것이 진리였고 목숨같이 여겼다. 그러나 매번 옷의 유행이 달라지듯이 인간의 가치관도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이 시대 우리는 돈에 목숨 거는 시대에 살고 있다.
여기에는 중요한 사항이 암시되어있다. 이 시대에 돈이 최고라는 말을 바꿔 말하면 돈이 시대를 초월한 절대불변의 가치는 아니란 것이다. 세상이 변하는 이유는 그 중심에 보이지 않는 본질이 있기 때문이다. 그 본질에 맞게 계절의 옷을 갈아입는 것이다.
그렇다면 본질이란 무엇일까. 본질이란 과보다. 모든 것에는 인과가 있고 그 과보가 따르기 마련이다. 돈도 예외가 아니다. 아무리 돈에 나쁜 돈, 좋은 돈이라고 쓰여 있지는 않지만 분명 돈에도 과보가 있다.
우리가 자주 입에 오르내리는 화제의 인물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거개가 대박부자들이다. 남들보다 더 빨리 많이 번 사람들 이야기다. 거액의 유산을 물려받거나 토지 보상금을 받거나 부동산 투기, 주식 투자 등으로 일시에 거금을 쥔 경우가 많다. 문제는 이런 졸부들이 자기 복(福)으로 착각한 다는 것.
앞 칼럼에서 언급한 바 있지만, 복(福)은 자기 마음가짐으로 쌓은 적금통장이고 운(運)은 대출통장이다. 그럴만한 노력이 없는 자가 일거에 거액을 거머쥐었다는 뜻은 무엇인가. 대출을 받은 것이다. 빚을 얻는 것이다.
거의 대부분 졸부들의 말로는 비참하다. 거액의 복권에 당첨되었어도 행복한 사람은 거의 찾을 수 없다. 운을 제대로 갚지 못했기 때문이다. 운의 대출을 제대로 갚지 못하면 사채보다도 더 무섭다. 가정이 파괴되고 건강을 망치고, 그것도 모자라 자식에까지 고스란히 과보가 미치기 때문이다.
이것이 피가 뚝뚝 흐르는 진짜 현실이다. 언젠가는 돌려줘야하는 대출을 받고 부자인양 착각하고, 주변 사람들은 이를 부러워하며 대박로또의 로망을 꿈꾸다니 기막힌 노릇이 아닐 수 없다.
특히 기업의 상속에 유의해야 한다. 아무리 개인의 회사이고 합법적으로 주권을 상속한 것 같지만, 기본적으로 복은 물려줄 수가 없다. 한 독립적인 영혼이 일군 마음의 복밭이 어찌 대물림 되겠는가. 우주 시스템의 조종을 받는 한 영혼의 업보를 어떻게 부모라고 한들 그 틀을 넘을 수 있겠는가. 결국 자식에게 ‘상속’이란 이름으로 ‘운이라는 대출 빚’을 떠안긴 것에 다름 아니다. 수많은 사원들과 경쟁자들을 희생으로 성장한 기업이라면 그 기업의 재산은 이미 개인의 것이 아니라 사회의 것이다.
‘부자 집안 3대가 못 간다’고 했고 ‘쉽게 들어온 돈 쉽게 나간다’ 했다. 어떤 해박한 경제지식보다도 평범한 이 상식이 오히려 본질에 가깝다. ‘성공해야 행복하다’는 생각, ‘유명해야 성공한 인생’이라는 생각 또한 현대인이 돈 버는 데는 주의해야할 또 다른 함정이다.
땅에 넘어져도 땅을 짚고 일어서야한다. 어차피 돈이 우상인 시대에 살고 있다면 ‘돈은 속물이야’하며 도피할 일이 아니다. 돈을 통해 영혼을 성숙시켜야한다.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댐은 없듯이 불행도 작은 곳에서부터 잉태된 것이다. 가정교육에서 부터 바로잡을 수 있다. 적어도 행복을 위해 돈을 번다면, 집안 식구들이 모였을 때가 좋은 기회다. 집안 어른이 빚 대출로 부자가 되라고 부추길게 아니라 돈에도 인과가 있다는 따끔한 충고를 해 주는 것은 어떨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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