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모 < 한국학중앙硏 학예연구원 >


즉위 초년 '이괄의 난'(1624년)이 인조 정권에 미친 파장은 컸다.

십여 년 만에 정권을 되찾아 등등하던 서인(西人)들의 기세는 여지없이 꺾였고,반란 발발 보름여 만에 도성(都城)을 버리고 황황히 충남 공주까지 피난을 가야 했던 국왕 인조의 체면은 구겨질 대로 구겨졌다.

부랴부랴 한강을 건너려는 인조 일행에게 사람들은 배를 내주지 않으려했다.

반면 '반란군의 수장' 이괄이 도성에 들어올 때는 모든 관청의 아전과 하인들이 의관을 갖추고 맞이했으며,"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시민들이 길을 닦고 환영하였다."

불과 일 년 전인 1623년 인조가 광해군을 몰아내고 반정(反正)하던 날 "오늘날의 성세(盛世)를 다시 볼 줄 몰랐다고 환호하던" 도성 백성들의 마음을 이처럼 크게 바꾼 것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첫째 모든 것을 뒤집으려는 새 정부의 성급함이었다.

정권 교체 초기에 서인들은 광해군 때의 것이라면 모조리 개혁하고자 해,폐지해서는 안 될 것도 기어이 고치고야 말았다.

같은 서인인 김상용이 나서서 "어찌 한 사람의 힘으로 한 나라의 일을 하루아침에 다 바꿀 수 있겠는가.

그 심한 것만 고쳐나가는 것이 나라 다스리는 방도"라고 지적할 정도였다.

둘째 반정공신들의 무분별한 이권 챙기기였다.

총 53명에 달하는 인조의 공신들은 광해군 정부의 인사들을 몰아내고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는 데 급급했다.

"아 훈신들이여/ 잘난 척하지 말아라/그들의 집에 살고/그들의 토지를 차지하고/그들의 말을 타며/또다시 그들의 일을 행하니/당신들과 그들이/돌아보건대 무엇이 다른가"라는 유행가는 당시의 민심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조의 정치하는 방식은 혁신적이었다.

우선 그는 지체돼 있던 국사를 신속히 처리했다.

갖가지 옥사(獄事)와 관리의 임면을 "천천히 하겠다"고 미루기만 하던 광해군과 달리 새 국왕 인조는 "하루에 몇 번이라도 좋으니 밀린 국사를 그때그때 처리하라"고 지시했다.

인재를 불러들이는 데도 적극적이었다.

남인 인사를 정승에 임명하는가 하면,김장생 등 재야의 원로지식인을 초빙해 국정운영의 지혜를 구했다.

이런 인조의 노력 덕분에 광해군 말기 내내 무기력하기만 하던 조정의 분위기는 청신한 기운이 감도는 역동적인 것으로 바뀌었다.

지방의 반란군이 도성을 점거하는 '초유의 사태'(이괄의 난)가 조기에 진압되고 국내정치가 안정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혁신적인 기풍 덕분이었다.

하지만 인조는 즉위 초년에 중대한 외교적 실책을 범하고 말았다.

명나라와의 '의리'를 내세워,새롭게 부상하는 후금(나중의 청나라)과의 외교를 경시한 잘못이 그것이다.

물론 전통적인 우방과의 관계회복을 집권의 명분으로 걸었던 인조로서는 광해군의 균형 중립외교를 그대로 지속시킬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즉위 직후 축하사절을 보내온 명나라 장수 모문룡에게 좀더 '냉정한' 태도를 보였어야 했다.

그리고 수만 냥의 은을 보내며 전례 없이 '성대한 은전(恩典)'을 베푼 명 황제의 사신에게 파병을 약속하지 말았어야 했다.

무엇보다도 그 전부터 후금에 억류돼 있던 강홍립 등을 배척해서 중요한 정보원을 놓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았어야 했다.

명분과 실리 사이의 균형점을 찾는 게 현대외교의 기본이다.

인조는 지나치게 명분에만 집착하다 민심이반을 겪었다.

균형점을 잃으면 돌이킬 수 없는 사태를 초래한다는 게 역사의 가르침이다.

취임 후 첫 미국방문을 앞두고 있는 이명박 대통령이 새겨보아야 할 대목이다.